[오아시스 교회]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스라엘 성군 다윗의 말년에 다윗이 인구조사를 해서 하나님께서 무섭게 진노하시고 선지자 갓을 통하여 7년 기근이나 3개월 원수에게 쫓기거나 사흘 동안 전염병(온역)의 벌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고 다윗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 땅에 전염병으로 순식간에 7만 명이 죽었다.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건만 무서운 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무슨 그렇게 큰 죄가 되어서 그런 무서운 벌을 받은 것일까? 인구조사란 군대에 갈 장정들을 조사하거나 세금을 걷기 위해서 조사하는데 그 시대에는 전쟁도 없었고 굳이 인구조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때였는데 다윗은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했고 그것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하나님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던 곳이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곳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패망하여 민족이 세계로 흩어지고 성전은 다 불타고 지금은 이슬람의 성지로 황금사원이 그곳에 있어서 관광지도 되고 이슬람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1900년을 유리 방황하다가 독립하고 성전이었던 그곳을 빼앗고 싶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이슬람은 결사적으로 지키는 성지로 그 땅은 큰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무서운 곳이다. 성경 속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큰 재앙을 당한 사건을 찾아보면 유월절 사건이 있다. 애급의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짐승의 첫 새끼까지 다 죽는 큰 재앙이다. 그때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집은 재앙을 당하지 않았고 그 재앙으로 인해 그토록 강팍하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게 하였다. 우한 폐렴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흉흉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 이때에도 우리는 어린양이신 주님의 보혈을 우리의 마음에 발라야 한다. 주님은 내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4복음서에 다 말씀하시고 강조하셨는데 사람들은 믿지 않고 두려워 떨고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이 좋았다고 다시 돌아가자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 죽을 때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 재앙을 물리쳐 달라고 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낫게 하셨다. 이 세상은 온통 독사들로 가득 찬 세상으로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데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시고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는 자는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 영생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그깟 폐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도 죽어도 영생이니 무엇이 무서울 것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16).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요 8: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그대는 믿으시는가? (갈 1:6-9)에는 매절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씀이 나오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무섭게 말씀하셨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왕같이 대접을 받는 목사들 세 분이 TV에 나와서 WCC에서 무당이 굿을 하고 진혼제로 영혼들을 위로하는 예식을 하고 염불을 해도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세상에는 별별 종교가 다 있으니까 서로의 통합과 협력을 위해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요, 외로운 길이다. 비록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넓은 길을 만들고 다 구원받았다고 천국을 보장하고 귀에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하고 사람들은 다 좋다고 큰 교회로 몰려든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어렵고 무서운데 세상 목사님들은 굉장히 인정이 많고 부드러워서 모든 것을 관용과 사랑으로 용납하고 인기를 끌고 대 교회가 되고 가난한 신학생들의 꿈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사 30:10-11). 요즘은 대중적 인기가 많은 포퓰리즘의 시대로 목사들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유머로 귀를 즐겁게 해주고 회개하라고 죄를 무섭게 책망하지 않는다. 계시록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회개하라’는 말을 일곱 번 했고 죄와 세상을 이기라고 하셨다. 그러나 대환난의 때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더라.’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온다. “아픈 곳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9:20,21; 16:9,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고난주간에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죄는 물론 민족의 죄와 세상의 모든 악한 죄들을 애통하며 탄식하던 아브라함과 롯과 노아처럼 우리도 가슴을 찢고 애통하고 회개해서 무서운 환난 속에서 구원받는 우리 가정과 교회가 되게 해야 하겠다. 지금은 온 세상이 전염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정말로 안타깝게 부르짖을 때이고 또 고난주간이다. 사람들은 두려워 떨면서도 회개하고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볼 줄을 모른다. 그동안 사느라고 너무나 바쁘기만 했는데 이렇게 자녀들과 같이 조용히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특별히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는 귀한 고난주간을 보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부활절의 복을 받게 해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는 주님을 우리 모두 바라보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