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교회] 광야에 버려진 아사셀을 위한 염소

전문가 칼럼

[오아시스 교회] 광야에 버려진 아사셀을 위한 염소

성경에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기를 희생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모리아 산의 수풀에 걸린 어린양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100세에 주신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고 하셨다. 사흘 동안 이삭이 번제에 쓸 장작을 지고 가면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산에 올라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급하게 두 번이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수풀에 걸려있는 양을 보게 하시고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리게 한 사건은 믿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큰 본이 되는 사건이다. 이삭 대신 제물이 된 그 어린양이 예수님의 상징이다. 늙은 아버지를 물리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죽기까지 순종한 그 아들 이삭은 농사꾼이 아닌데도 농사를 지으면 100배나 풍성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게 하시고 두려워하게 하여 먼저 이삭에게 친목을 청하게 하였다. 죽기까지 순종한 이삭도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예표다. 

  둘째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고 하였다(고전 5: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떠나기 전날 밤에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고기는 불에 구워 먹고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다. 그날 밤에 애급의 장자들과 짐승의 맏새끼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였는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 집은 재앙을 면하였다. 이 세상에 사는 크리스천들도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각자의 마음과 가정의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신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니 꿀처럼 달게 말씀을 먹고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음 판에 새기고 바르라고 하신다. 

온 세계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가? 세상 죄를 탄식하는 자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정말 그런 때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면 

  ① 맏아들이 죽는 재앙이 넘어갔다. 

  ② 노예의 땅 애급에서 해방되어 나오게 된다. 애급이란 이 죄악 된 세상이요, 마귀의 나라를 말한다. 세상에 살지만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천국 법을 지키고 천국의 왕이신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천국으로 간다. 

  ③ 더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주님의 종이 된다. 공산주의는 겉은 좋게 포장하나 너무나 악하다. 자본주의도 좋은 것 같으나 인간을 물질과 권력의 노예로 살게 만든다. 그래서 세상 법은 완전하고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불안전한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방법은 불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게 될 때 세상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것이다. 

  셋째는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죄일의 속죄 제물이시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한번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대 속죄제사를 드리는데 두 마리의 염소를 뽑아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단 모퉁이에 바르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려서 백성들의 죄를 속함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죽은 염소의 피를 손에 발랐던 제사장이 그 염소 머리에 안수하여 백성들의 죄를 고한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1-2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살인강도 바라바를 불러와 둘 중에서 누구를 놓아줄까를 물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살리라고 아우성을 쳤다. 공동번역성경은 ‘바라바’의 이름도 ‘예수’였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 택하고, 바라바를 ‘아사셀을 위한 제물’로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택함 받아 광야에 보내진 염소는 바라바에서 끝나지 않는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도 죽지 않고 광야에 보내졌다. 더 나아가 오늘의 우리들도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 보내지지 않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고 황막한 광야로 가서 버려짐을 당한 아사셀을 위한 염소 제물은 그 험한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사나운 짐승들 속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었을까? 차라리 단번에 죽임을 당하는 편이 더 쉽고 편한지 모른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작은 예수들이다. 오늘 이 세상은 너무나 악하고 음란하고 재앙은 끊임없고 전염병은 계속 더 번지고 서로를 경계해야 하고 황폐한 광야와 같지 않은가? 무섭고 사납고 광폭한 짐승들이 사는 광야에 이 세상 죄를 지고 광야에 버려진 한 마리의 염소는 누구인가? 이 세상 죄를 지고 탄식하며 우는 자, 그 이마에 인침을 받은 당신이 아닌가? 제자들은 이 염소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지만, 바라바는 아마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을 것 같다. 혹시 이 세상의 죄를 당신도 짊어지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생명도 바치라고 아직 당신이 광야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의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탄식하시지 않으시는가?

  우리가 최소한 나의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서, 내 교회, 내 사회와 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고 더 나아가서 온 세계의 죄악을 위해서 가슴을 치고 안타깝게 기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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