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동족선교] "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박상원목사_기드온동족선교(GBMW) 대표
필자(주) 75년동안 극심한 픽밥과 탄압 속에서도 정금같은 믿음과 보배같은 복음전도를 지키며 실천한 북한지하성도님들의 이야기들을 함께 협력하여 동족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강석진목사의 동의를 받아 최근 저서 ' 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의 중요내용들을 발췌하여 소개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명령하시는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필자의 부족한 식견과 함께 겸손하게 기도하며 배우는 심정으로 나누고자 한다. 두고 온 남/북한 고국이 현재 아프고 어려운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가올 미래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이 위대할 수 있다는 주님의 보내심과 뜻하심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북 지역의 교회가 부흥이 된 포괄적 요인 - (1)지역과 사회적 배경
이북 지역의 교회들은 타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성장과 부흥을 하게 되었다. 1898년 당시 한국 장로교 전체 교인수가 7천 5백 명이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서북 지역(평안도.황해도)의 교인수가 5,950명으로 전체 교인의 79%를 차지하였다. 여기에는 서북 주도의 교회 성장에는 몇 가지 시대적, 사회적 요인이 있었다.
첫째, 청일전쟁(1894~1895) 중에 전쟁의 격전지가 되버린 서북 지역(평양)에 있었다. 전쟁 중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일반 계층이 피난처로 대거 교회로 몰려왔다. 또한 이들 피난 교인들에 의한 신앙이 지방 확산으로 이루어져 지방교회 설립이 본격화 되었다. 특히 평양 출신 교인들이 청일전쟁 중에 황해도와 평안도 각 지역으로 피난하면서 광범위한 그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최대의 교인수를 자랑하던 황해도 재령읍 교회로 피난 갔던 평양교회 성도인 한치순과 이영언의 전도로 설립된 교회였다. 평양 교인들의 지방 분산으로 인한 지방 교회 설립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선교부의 전도 사업은 대체로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들 평양의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 개척이 지방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둘째, 서북 지역에는 양반 계층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유교의 힘이 서북 지역에는 그다지 크지 못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조정에서는 서북 지역을 정책적으로 배제해 왔다. 서북 지방은 홍경래 거사 이후 왕실의 견제 대상이 되어 왔다. 따라서 서북인들은 과거에 급제하여도 실제 벼슬에 오르는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서북 지방의 지식인층은 사상적으로 진취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숭실학당의 설립자인 베어드(William M.Baird)선교사는 ‘남과 북의 조선’이라는 기고에서 서북 사람들의 특성을 ‘독립적이고 굳센 기개’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서북 지방 사람들이 진취적일 수 있었던 것은 벼슬길에 오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 일종의 지식 계층을 형성하여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통로가 바로 기독교였다.
셋째로, 서북 지역에는 일찍부터 ‘자립적 중산층’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광린 교수는 초기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사회계층이 이들 ‘자립적 중산층이었다고 보면서, 이러한 사실이 이 지방에서 일어난 단시일 내의 개신교의 발전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북 지역은 평야보다 산지가 더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농업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다. 또 중국과 지리적으로 접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넷째로, 중국과 접해 있음으로 문물 교류가 상도들과 사신들을 통해 교류 행로가 되었기에 지리적인 조건은 개신교의 수용과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만주지역을 통해 복음이 전래되면서 서북지여 사람들은 일찍부터 개신교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 실례로서 1883년 최초의 한글 성경이 평안도 의주의 봇짐 장사꾼들이었던 백홍준, 서상륜 등에 의해 서북 지방에 전래 되었다.
다섯째로, 선교사들의 사역 중심축이 초기에는 한성(서울)과 경기 지역과 호남 지역이었으나 점차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역으로 옮겨졌다. 1910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났다. 장로교의 경우 이북 서북 지방의 신도수가 23,483명인데 반하여 경기, 호남 지방의 신도 수는 2,975명으로 약 8:1의 비율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이북 지역과 이남 지역의 종사하는 수에서도 1887년에서 1910년까지를 기준으로 하여 45:25명으로 앞섰다. 특히 마펫 선교사의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과 운영은 목회자의 산실이 되었고 그 당시 조선 교회의 중심이 되게 되었다.
여섯째로, 기독교를 수용하는 주체 측면에서 볼 때 이남 지역은 유교 전통 사회를 지탱하는 양반 사회의 중심지를 이루어 왔다. 초기 단계에서 지식층은 ‘개화 지향적 동기’가 강하였던 반면에 이와는 상대적으로 이북 지역(서북)의 신앙인들은 ‘신앙적 동기’가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선교사들의 선교 지향 측면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이남 지역에는 주로 사역의 방향이 교육, 의료, 사회 사업 등으로 문화 사역으로 나타났고, 이북 지역은 주로 전도 사역과 교회 설립에 비중을 두었다. 여기에는 이북 지역의 주민들은 개방성과 개척 성향이 강하게 작용되어 그 지역의 복음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