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칼럼] 탈북민 목회자 간증(1)
유년 시절과 가명을 쓰는 이유.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현정입니다. 본명과 가명을 쓴다면 모두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있기에, 그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해야 할 것 같아 가명을 씁니다.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이 투병 생활을 오래 하셔서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저의 집은 9남매입니다. 딸 여섯 명과 아들 셋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도 늦둥이다 보니 언니 오빠들은 사회 진출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은 한적한 동네를 다니며 모래를 머리에 수십 번씩 올리고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다른 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유년 시절이 박복한 것은 아닙니다. 무한한 형제 사랑과 끈끈한 형제애 속에서 자랐으니까요. 사회성도 같이 길러진 것 같습니다. 어려서 노래를 잘 불러 학교를 대표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유년 시절은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북한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행복했습니다.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제가 15살 때 일입니다. 저에겐 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오빠 두 분과 저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북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귀히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들 둘을 잃은 저희 부모님으로서는 막내아들인 저의 오빠가 집안에 기둥이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오빠가 군에 나갔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오빠 나이 20살이 되는 해였네요.
북한은 ‘핵심 계층’과 ‘기본군중’과 ‘복잡군중’으로 나뉘는데 제가 지금 느끼기에 아마도 우리 집은 ‘복잡군중’이었나 봅니다. 북한에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하던 우리 집으로서는 아들을 군대 내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신 성분이 안 좋은 가정에서 군대에 가지도 못하고 노동당 당증도 어깨에 메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매장입니다.
그래서 오빠는 군사동원부에 수시로 다녀 자기 힘으로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남들도 위험하다고 기피하는 건설 부대였습니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을 얼마나 잘하고 성실했는지 외화벌이 부대로 넘어간 것이었지요. 집에서는 몰랐습니다. 집에 휴가를 나오면 부모님 얼굴도 볼 수 있고 동창들도 만날 수 있는데, 부대 복귀할 때 챙겨 가야 하는 뇌물로 부모님들께 민폐를 끼친다고 휴가도 나오지 않던 오빠였습니다.
서해에 외화벌이 부대로 나간 오빠 부대는 군인 간부들의 사택과 군인들이 생활하는 군부대 군영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섬에 나무 베러 갔다가 배가 좌초되면서 30명 중 15명의 군인들이 무리로 사망하는 그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신을 건지지 못해 빈 무덤 15개나 세워진 오빠 부대에 다녀오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이상 미련도 희망도 없는 북한에 심지어 오빠가 사망한 그해는 김일성이 죽은 해이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4년이었습니다.
탈북하게 된 동기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기능공학교(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치지 못하고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쉼에 있어 가장 기초체력을 만드는 끼니는 하루 세 때는 아니더라도 하루 한 끼라도 먹어야 하는데 먹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의 면역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질병들이 전 지역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처음엔 장티푸스(설사병), 그리고 파라티푸스(열병)가 퍼지기 시작하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도둑질해 먹다 맞아 죽고, 얼어 죽고 말도 못하는 온갖 죽음이 북한 전 지역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뭐! 우리 집이라고 안 왔겠습니까? 당연하게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둘째 언니, 그리고 저, 아빠, 엄마 순으로 막 치고 들어오는 거지요. 당시 먹을거리가 없다 보니 산에서 고사리, 삽주 뿌리 등 약초를 캐서 다듬고 쪄서 말리면 외화벌이 상점에 가서 중국에서 나온 말 사료 밀가루(검고 깔깔한 겨가 섞인)를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북한 주민들이 다 장마당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풀과 나물을 캐서 한 끼 벌어 한 끼 먹고 겨우 버텨내는 실정에 집안에 환자가 났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마지막 희망인 아들을 땅에 묻고 가슴에 한이 맺혔던 어머니는 또다시 자기 손으로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자식과 남편을 땅에 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북한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혼자 은밀히 움직였습니다. 먼저는 몸이 회복되어야 두만강을 건너겠으니, 언니들 시집보내려고 준비하셨던 그릇 가지들과 옷감들을 모두 옥수수 감자와 바꿨습니다. 외상도 하고 그렇게 탈북할 계획을 세우신 것이죠. 브로커를 찾고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시간을 맞춘 후 두만강을 건너서 다시 돌아오는 계획까지 철저히 세웠습니다.
낟알이 없이 맨 감자만 간(소금이나 된장)이 없이 매끼 3일 정도 먹으면 몸에 정전기가 입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서 이명(耳鳴)만 들리고 사람 말소리는 들리지 않던 귀에서 세상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건넌 두만강
3개월 동안 부지런히 몸을 보양하고 이제 두만강 건너기 이틀 전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는 9살과 7살 된 조카들이 와있었고 언니는 장사를 나갔는데 두만강을 건너기로 약속한 이틀 전에 갑자기 저희 큰언니가 온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언니를 앉혀놓고 조용히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함께 탈북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집안 사정을 보니 누워서 아직 회복 중인 두 동생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시는 아빠를 보고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한가지니 그래도 용기를 내서 중국에 가 약 써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머니 떠나십시오.” 온 가족이 다 도망가면 보위부, 안전부, 여맹, 인민반 할 것 없이 뒤쫓을 테니 내가 그들이 의심하지 못하게 인질로 남아있을게요. 꼭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언니와 두 조카를 남겨둔 채 1997년 7월에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