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원 기드온칼럼] 박상원 목사 동족 선교 이야기
오랜만에 다시 보는 두만강 물줄기와 건너편의 산들을 보니 일송정에서의 상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강 건너의 북녘 동족들이 받고 있을 굶주림과 목마름을 생각하니 다시 쨘해지는 이유는 1997년 필자가 장신대 신대원 2학년 재학 중 여름선교트립으로 두만강에서 처음 만났던 그들의 모습과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각기병(영양실조로 다리가 휘어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으로 먹을 것을 찾아서 두만강을 거의 기다시피 건너온 함흥대학교 전체 2등을 차지할 정도로 똑똑했던 중학생 만한 키의 여대생과 새까맣고 아주 작은 키들의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1997년 2월 처음으로 한국언론에서 '북한 함흥에서 배가 고파 인육을 먹은 사건'이 첫 보도가 되었었다. 필자가 그때 조심스럽게 그 여대생에게 물었었다. "정말로 살고 있던 지역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네~~ 인육을 먹었던 그 범인을 다음날 잡아서,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총살을 하는 광경을 보았어요..." 그녀가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답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가 통일은 해야겠는데, 지금 이러한 상태에서 통일을 하면 너무 혼란할 것 같으니 어느 정도 서로가 안정이 된 후에...' 이 경험을 하면서 나름 통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나서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서울의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서 목회를 경험하다 세브란스병원에 임상목회교육(C.P.E) 수퍼바이저 자격을 취득하며 전문적으로 환우들과 가족 보호자 그리고 교직원들을 5년간 다양한 영적 진단과 위로 사역, 교육 사역을 하다가 미국에 유학으로 건너와 이렇게 북한 동족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게 된 데에는 많은 기억들과 부름의 결과였는데 20년 후에 내가 그 두만강 앞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했다.
계속해서 두만강 앞에서 보고 경험했던 지난 18년간의 모습들이 6월초 푸릇푸릇 돋아난 나뭇잎들과 새싹 그리고 약간은 폭이 작아진 두만강과 함께 보였다. 도로변의 이전의 철조망들은 낡았고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처진 새 철조망과 고성능 카메라들이 더 즐비하게 우뚝 섰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한 탈북 동족들을 거두고 심문하는 도문 변방 수용소는 아직도 건재하게 도문 입구 건너편에 있었다.
2010년 초 통행증을 가지고 건너온 북주민들과 숨어 있던 탈북 동족들에게 치과 진료를 했는데 잇몸치료를 위해 첫 마취주사를 맞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 잠들어 버린 40대 북 주민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잠시 마당에서 두만강쪽을 바라보던 중 옆에 그 3층짜리 수용소를 보는 순간 정말로 가슴을 조렸던 순간들...
이 치과진료를 성공하기 위하여 마치 첩보작전을 하듯 여러 차례 약속 시간과 장소를 변경해야만 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왜 구체적인 진료 스케줄이 없느냐고 약간 따지듯이 물었던 처음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이 비로소 이해하고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하던 진지했던 작은 목소리들...주님은 그 순간을 모두 지켜보셨을 것이다.
도문 광장과 일광산 일대 도로(사람이 다는 길 모두)를 뒤덮은 고성능 카메라들 덕분에 필자와 우리 일행은 두만강 앞에서 무장한 공안에게 또 검문검색을 당했다. 그 어마어마한 고성능 감시카메라들은 두만강을 보는 우리들을 보고(감시)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