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어릴 때의 추석(秋夕)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어릴 때의 추석(秋夕) 

이성수(수필가·서북미문협회원)           


추석이 돌아왔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위가 심했다. 이곳 시애틀에 화씨 110(섭씨 44)도의 역대급 폭염이 찾아와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런 더위를 이기고 추석을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추석날 한국에서 한 것처럼 아침에 토란국과 쑥 송편을 먹으며 애써 추석 기분을 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추석 생각이 났다. 추석 무렵에는 가을걷이를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았는데 나는 아버지를 도와 많은 일을 해야 했다. 


한창 놀 나이에 놀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책보를 팽개치고 땀 흘리며 일을 했다. 저녁때면 들판에 쌓아 놓은 가을걷이한 것을 지게로 져 날랐다.


어둡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늦여름 더위로 나는 땀범벅이 되었다. 지게를 지고 일하는 것이 땀이 더 많이 났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생각에 짜증까지 났다. 하지만 추석이면 일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더욱 추석날이 기다려졌다.


해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에게 추석날이면 추석빔을 한 벌씩 사주셨다. 추석날 나는 이 새 옷을 자랑하며 친구들과 놀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어려운 어린 시절 평소에는 고깃국을 먹지 못하다가 설과 추석날에만 먹었다. 어르신들 생신날은 암탉을 잡아 잔치하고, 우리들 생일날에 어머니는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


작은 추석날 마을에서 돼지를 도축하여 나누어 주었다. 돼지고깃값은 곡식으로 갚기로 하고 외상이었다. 아버지는 고기가 부족하다며 조금 받아 오셨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는 큰 가마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3년도 더 된 묵은지를 썰어 넣고 돼지고기 찌개를 끓였다. 오래간만에 구수한 고깃국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우리 식구들 모두 저녁을 맛있게 포식(飽食)하였다.


난 그때 먹은 돼지고기 김치찌개 맛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입에 와 닿는 묵은지와 돼지고기의 야릇한 깊은 국물 맛과 혀에 스르르 녹는 부드러운 감칠맛! 그리고 비계 하나 없는 졸깃한 돼지 껍데기의 그 씹히는 식감(食疳)의 고소한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송편을 빚었다.


나는 집안 바깥일에서 해방이 된 것이 너무나 좋아 친구들과 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팔월 열나흘 둥근 달이 동산에 두둥실 떠올랐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일은 너무도 즐거웠다. 한밤에 집에 돌아오는 나에게 어머니는


“넌 여태 무엇 하다가 이제 오냐?” 


사랑방에 쓰러지기 전까지 아마 오늘 하루 백리 길을 돌아다닌 것처럼 몸이 나른하였다.

나의 어릴 때는 해방 후였는데 식량이 부족하여 미국이 먹고 남는 잉여농산물(剩餘農産物)인 밀, 옥수수, 분유 등을 원조받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GNP)이 ‘마이너스 $50’이었고, 세계에서 방글라데시 다음으로 2번째 가난한 나라였다. 


동네 누나들의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서로 이를 잡아 주고 있는 광경을 본 미국 선교사(宣敎師)들이 디디티(DDT)란 약을 머리와 옷에 하얗게 뿌려 '이'를 퇴치해 주었다. 


그리고 입을 옷이 부족한 부녀자들은 원조물인 밀가루를 담았던 포대로 옷을 해 입고 다녔는데 그 옷에서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점심시간이면 학교에서 쪄준 분유를 뜯어 먹으며 시장기를 면했다. 요즈음의 급식(給食)이었다. 


이 이야기를 손자 놈에게 하였더니   


“할아버지! 배고프면 왜 라면을 끓여 먹지 않고 분유를 쪄 먹었어요? 

“응! 그때는 라면이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할아버지! 왜 라면이 없었어요?” 


살기가 풍요로워진 지금, 70여 년 전의 배고팠던 시절 이야기를 손자에게 해야 세대 차이가 너무 커서 이해시켜 주는 데 힘이 들었다. 


추석날이면 우리는 보리밥만 먹다가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고, 송편과 떡, 부침개 등을 배 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더도 덜도 말고 추석 한가위만 같아라”란 속담처럼 추석 하루는 넉넉하였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 애들을 집으로 불러 송편과 떡을 먹이곤 하였다. 


지금 같으면 각자 자기 방에서 들어앉아 컴퓨터나 전자 오락기, 스마트 폰에 몰두할 나이인 우리들은 흙 마당에 주저앉아 손으로 흙을 만지며 ‘땅따먹기 놀이’를 하기 위해 바심하려고 고운 찰흙을 맥질한 넓은 마당으로 남녀 동리 애들은 속속 모여들었다.


마당에 길게 줄(線)을 긋고 그곳에 앉아 줄을 기준으로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옆 애와 짝꿍이 되어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기는 편이 오른 엄지손가락을 땅에 대고 손을 마음껏 펴 한 뼘 원을 그린 면적만큼 땅을 빼앗았다.

 

아버지가 땅이 없어 소작을 하는 나에게는 땅따먹기가 절실하였다. 땅을 많이 따서 소작을 면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나 뿐 아니라 대다수의 애들 집은 땅이 없이 소작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소리를 질러가면서 한 평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꽤나 많은 땅을 빼앗았다. 저 아래에서 고전하는 애들도 보였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가위~, 바위~, 보~를 외쳐댔다. 나는 운이 좋아 많은 땅을 딸 수 있었다. 


어느새 짧은 가을 해는 서산을 넘었고 동구 밖 동산에 쟁반 같은 팔월 보름달이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었다. 애들은 한 평이라도 더 땅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때였다. 어머니가 누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동생 데리고 얼른 저녁 먹으러 오라 하셨다. 애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은 한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어느새 얇은 어둠이 서서히 깃들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재촉이 심하고 이웃 어머니들도 애들을 데리러 나와 있었다. 이제야 누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아! 죽을힘을 다해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딴 땅을 놓고 일어서는 나는 너무나 아까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내 땅이었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없는 마당의 흙에 불과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여러 애들이 땅 따먹으려 왁자지껄 떠들던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다만 따놓은 땅만이 주인을 잃은 채 쓸쓸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보름달의 은빛 가루가 텅 빈 마당 위에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내일부터 추석날 노느라고 못 한 만큼 많은 추수(秋收)일을 해야 한다. 더도 덜도 말고 추석 한가위가 사흘만 더 연장(延長)되었으면 친구들과 실컷 놀 수 있을 터인데 그게 한없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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