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마 제일침레교회]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전우일 목사)

전문가 칼럼

[타코마 제일침레교회]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전우일 목사)


□ 제목: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9.12.2021 전우일 목사) 


□ 본문: 사사기 13:4-5 


  


‘정죄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은혜로’: 사사기를 읽다 보면 매 번 독특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심각한 죄를 짓고 살았던 사사들의 이야기들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사사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 마다 먼저 그들의 죄를 [정죄]하게 되지만, 결국 [공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기드온]과도 같은 끊임없는 욕망의 사람이며, [입다]와도 같이 늘 내 이익만을 챙기기 위하여 계산이 앞서는 사람이고, [삼손]처럼 교만하며 끝까지 나 중심적으로만 살고 있다 것을 [공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며, 그 ‘죄’를 구경만 하고 있던 나의 육적인 시선이 변하여 영적인 면을 보게 되어지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와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 은혜에 감격하게 되면서, (먹고 사는 문제, 자식 키우는 문제, 인생에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만 쫓기며 살지 않고) 나도 한 번 즘은 ‘구원의 도구’로서 제대로 한 번 쓰임 받고 싶다는 그런 목표와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 사사기 13장의 삼손의 이야기에서도 - [정죄]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은혜]로, 그리고 [소망]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귀한 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 나는 누구인가? (사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삼손의 정체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손의 엄청난 ‘힘’만을 기억하며 시대의 영웅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정해버리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다른 정체성으로 보셨습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 죽는 날 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 으로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자기가 원해서 [나실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 보니 [나실인] 이었고, 죽을 때 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도록 ‘정체성’이 정해져 버렸습니다. 즉,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사람들의 은근한 눈초리에 등 떠밀려서 겉모습은 [나실인]으로서 보여졌는지는 몰라도, 그 속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접근으로 삼손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불순종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집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사사기에서 단 한번도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더 반항합니다. 부정한 이방 땅을 드나들며, 늘 음란하게 살며, 부모님을 속이며, 하나님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실패한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삼손을 [나실인]으로 살게 하셨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삼손의 타락과 교만을 모르셨을까요? - 저는 여기에 두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삼손의 실패’는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사사’로서도 실패하였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된 진정한 [나실인]과 같은 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천하고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이 실패하였다고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완벽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지 말고, 오직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2. 삼손을 본보기로 우리의 부르심을 깨닫게 하신다: 당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부르심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사기 시대 중 가장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압제를 받던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여호와의 영]이 임하실 수 있는 [나실인]과 같은 부르심의 한 사람, ‘구원의 통로’를 찾고 계셨습니다. 즉, 죄악 된 세상과 구별되어(거룩함이 몸에 베이도록)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한 사람’, 오직 하나님 때문에 살아 갈 수 있는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는, 반복되는 어떤 패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하나님이 처음부터 바라보시던 삼손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처음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 될 때부터 [여호와의 영] 이 그에게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13:25). 또한 사자를 만났을 때에도 그랬고(14:6),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갔을 때에도 [여호와의 영]이 임하십니다(14:19). 그리고 ‘나귀 턱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심판한 날도 그렇습니다(15:14).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할 때, 그야말로 진짜 삼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극도로 교만하게 된 삼손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동안 삼손에게 임하셨던 [여호와의 영]이 떠나 버리십니다(16:20).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삼손이 머리털을 잘라서 그래서 능력이 없어졌다고 그렇게 넘어가 버리지만(그것이 삼손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긴 머리카락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실 수 있는[나실인]의 상징일 뿐 입니다. 즉, 이 날 삼손은 스스로 [나실인]의 [정체성]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지식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정결법을 지키며 남들과 구별되어 살면서 지겹도록 들어온 자기 정체성을 왜 몰랐겠습니까? 위기 때 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서 자기를 사용하신 것을 본인이 왜 모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삼손은 그 모든 능력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힘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교만, 그 위선과 욕망이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르심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지켜 나가야 할 거룩한 소명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긴장해야 합니다. [정죄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은혜로]  진정한 은혜와 소망의 지경으로 나아가려면, 삼손의 이 안타까운 모습을 통해서 먼저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여호와의 영], 즉, 성령께서 힘을 주셔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내 부르심은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지만 삼손은 고난 중에서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힘’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나실인]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 합니다. 삼손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습니다.  패역한 세대 가운데에서 오직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는 한 사람으로서, 죽을 때 까지 ‘죄’로부터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자기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삼손의 이야기가 ‘힘’이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삼손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보고 계셨던 부르심의 ‘한 사람’, [나실인]의 정체성으로 사용하십니다. 오직 [여호와의 영]이 임하실 수 있는 그 귀한 정체성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 주시고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원수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지금까지 삼손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그 ‘죄’를 [정죄]하였다가 [공감] 하는데까지 되어졌다면, 그렇다면 이제 ‘은혜의 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소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적극적으로 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삼손의 불편한 모습이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삶에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길 때에, 무엇을 먼저 선택하고 있습니까? 만약 현재 나의 삶의 모양이, 기도와 예배, 그리고 경건 생활을 내려놓고 있었다면, 나 역시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기도의 시간이 더 늘어나야 합니다. 두 눈이 뽑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삼손과 같이, 블레셋과 같은 이 세대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힘’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정말 깊게 묵상 하십시다.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에 생명을 다하십시다. 전도하십시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삼손이 삼손이 되게 하셨듯이, 거룩하신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 임하셨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확신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 부터,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죽을 때 까지, [나실인]과 같이 구별된 한 사람으로서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또다른 일주일의 시간이 시작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에는 삼손과 같이 부르짖으며, 나에게 이번 한 번 만 힘을 달라고 간구하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실패하는 그 현장속에서, 부르짖음을 통해,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를 찾게 되시는 가장 복 되고, 형통한 저와 여러분,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적용 질문] 


1.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2. 하나님께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우리도 삼손처럼 함께 부르짖어야 할 제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4.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받은 은혜를 나누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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