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마 제일침레교회]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전우일 목사)

전문가 칼럼

[타코마 제일침레교회]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전우일 목사)

□ 본문: 누가복음 11:1-4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오늘 본문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 선한 이웃인가?)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이 부분에서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문자상으로는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사실 누가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는 이미 ‘진정한 평강’을 누리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거의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이미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누가는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날 율법 교사가 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왜 ‘영생’에 관하여 질문을 했는지 이 질문의 의도와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험에도 능히 이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셨음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누가는 ‘진정한 평강’을 누리며 영생에 관한 복 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써 내려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승리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생을 소유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서 전체에서 특별히 ‘시험’ 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마다, 오히려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에서 4장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바로 그 장면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알고 있는 누가는 처음부터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완벽히 승리하셨으며, 그 예수님께서 삼 년 후에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게 되지만,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완벽히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며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전에 구원의 확신이 없던 나의 옛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율법 교사가(단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영생’까지 거론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이 질문안에 구원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실 율법 교사는 질문 자체가 잘 못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영생을 받을 수 있는가?’,,,믿음에 관한 것을 질문 했어야 하는데 행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구원관이 잘 못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지한 율법 교사에게 오히려 행위에 관하여 되 물으십니다. ‘쉐마의 말씀’ 즉, “네가 가르치고 있는 율법과 행위의 핵심인 ‘신명기 말씀’에는, 무엇을 하라고 나와 있느냐?” 역으로 행위에 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율법 교사와 유대인에게 ‘행위에 대한 모순’이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암묵적으로 지키지 않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입고 있던 옷도 다 빼앗기고 너무 심하게 맞아서 거의 죽을 정도까지 되어져 길 가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세 사람’이 이 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인 어떤 제사장이 그를 보고서도 서둘러 피하여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어떤 ‘레위인’도 똑 같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립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거룩한 행위인 ‘제사’를 주관하기 위하여, 율법으로 성별 되어진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특히 제사장 같은 경우에는 누구 보다도 율법을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 위에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이 두 사람은 잘못 한 일이 없습니다. 당시 모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당연하게 지켜오던 ‘정결 법’이고, 아마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왜 그것이 문제인가?’ 라고 반문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답을 알려주십니다.

 

율법의 행위 안에 갇혀 버린 채,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만이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영생에 관한 말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도취되어서, 불쌍한 이웃을 보고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버린 부정한 세대에게(자기 모순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살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참고로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비’라는 단어를 여러 군대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침내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탕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을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눅15:20).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인성’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던 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실 때에도 똑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눅 7:13)

 

다시 말해서, ‘탕자의 아버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외면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알며,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자비로 부터 시작되어지는 사랑의 행위’가 담겨 있는 사람들 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웃에게 가서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시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예수님과 같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평강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늘 본문의 율법 교사처럼, 똑 같이 저와 여러분을 시험할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여야 영생을 받는 것이냐?, 너희의 행위로 증명해 보라” 동일하게 우리를 시험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할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평강을 누리며,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듯이,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순간마다, 결국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며, 내가 그 십자가에서 선포된 완벽한 승리로 말미암아 날마다 넉넉히 이기며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의 실체는, 나에게 희생이 요구되어지는 피곤한 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델로 삼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긍휼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비용이 들 수도 있고, 지속적인 정성이 요구되어지고, 잠을 자지 못하고 돌보아야 할 정도로 피곤한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영생을 소유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에 시험 앞에서도 평강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나인성의 과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먼저 가까이 가서 위로 할 수 있는 ‘참 이웃’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기 내어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기꺼이 달려가서 안아주십시오. ‘잘 왔다’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참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웃을 불쌍히 여길 줄 알며, 끝까지 도와 줄 수 있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사마리아인’ 과 같은 긍휼의 사람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묵상 질문]

1.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2. 율법교사가 말하는 행위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 내가 긍휼함으로 섬겨야 할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4. 어떻게 해야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5. 우리가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긍휼함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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