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韓國 4-H운동의 발자취(4)

전문가 칼럼

[동열모칼럼] 韓國 4-H운동의 발자취(4)

<지난 호에 이어>


이렇게 21일 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원만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갈 때와는 달리 매우 홀가분했다. 


그 까닭은 미국을 향해 갈 때는 우리 연수생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막상 현지에서 만나보니 뜻밖에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였고, 미국 측과의 이해 부족으로 발생한 분제도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출장을 이렇게 잘 마치고 귀국하니 국내에서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다. 


국내의 여러 신문에 KATP 연수생들이 그곳에서 정착할 목적으로 연수 농장을 

이탈했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미국으로 보낸 전체 연수생 244면 중에서 무려 43%에 이르는 116명이 농장을 

이탈했으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신문 보도에 대해 중앙정보부와 청와대가 실무 책임자인 나를 불러 진상 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우리 민초들에게는 무섭기만 하던 이곳에 불려가 날카로운 심문을 받으면서도 

나는 평소에 이 KATP사업에 대해 지니고 있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조리 있게 진술했다. 

 

내가 진술한 논리는 우리 연수생들의 강인한 의지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 이탈한 연수생은 장차 미국 땅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했다.  


사실 우리 연수생들은 4-H회원으로서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영어 한마디 못 하면서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미지의 땅에 뛰어들었고, 문화가 다른 생소한 땅에 뿌리 박으려고 모험을 강행한 그들의 패기와 용기를 나는 값지게 여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이탈자는 정부의 지원을 한 푼 받지 않고 미국 땅에 정착해 그곳에서 성공함으로써 장차 우리 민족의 海外資産이 된다는 확신을 피력했다. 

   

이러한 내 진술에 대해 청와대는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에서는 내 논리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알아차리고 묵시적으로 

격려까지 했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거칠게 심문하다가 내 소신을 이해하고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이제 돌아가시오. 잘 알았으니 다시 소환하지 않겠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이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문자 그대로 뛰어난 지능(Intelligence)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이탈자에 대해 내가 품었던 기대가 결국 적중했다.  


1986년의 어느 날, 농촌진흥청의 내 사무실에 신사복 차림의 청년 5명이 찾아왔다. 

뜻밖에 나타난 이들이 누구인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이들이 자기 소개하고 찾아온 사연을 말했다.  


이들이 바로 미국 연수 농장에서 이탈해 이제 미국 시민으로 성공한 KATP 연수생인데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몰라보게 성장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옛 제자들을 만난 듯한 흐뭇한 심정으로 지난날의 연수생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KATP의 제1진 연수생으로 1972년에 미국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해 

현재 워싱턴DC의 교민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鄭文喆씨가 지난 2018년에 모처럼 고국을 

방문했기에 45년 만에 만나 함께 그의 고향 강원도에 가서 즐거운 여행을 한 

아름다운 추억도 새로워진다.


이렇게 추진한 4-H연수사업(KATP)이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파송된 

광부와 간호사들과 함께 우리 민족이 해외에 진출해 그곳에서 성공한 모범적 사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우리 농촌에서 역동적으로 전개하던 4-H운동이 오늘날에는 쇠퇴하고 있으니 

진실로 안타까운 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 4-H운동이 더욱 그리워진다. <끝>

0 Comments
제목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