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3.1運動 103주년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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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열모칼럼] 3.1運動 103주년의 역사적 의미

금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은 우리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탈당한 지 꼭 10년 뒤인 1919년의 3월 1일에 일어났다. 이날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인 인파가 <대한독립 만세>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이렇게 외친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세계만방에 토로함으로써 우리 만족의 의연한 기개를 외부 세계에 유감없이 알렸다. 


이렇게 일어난 3.1운동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그 임시정부가 8.15광복 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모체가 되었으니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뿌리라는 사실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3.1운동이 일어난 동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권(自決權)>에서 싹텄다.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권은 “모든 민족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원칙이기 때문에 당시 일제의 무단정치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소망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당시의 민족 지도자 모두가 뜻을 모아 차제에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인 1919년의 1월 21일에 마침 고종황제가 덕수궁에서 승하해 백성들의 비통까지 겹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종교단체 대표들이 모여 3.1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이 계획에 동참한 민족 대표는 천도교 대표 손병희와 최린, 기독교 대표 이승훈, 불교 대표 한용운 등 33명이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까지 했다. 


이들 33인 대표는 3월 1일의 아침에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정오에 자리를 파고다 공원으로 옮겨 운집한 군중 앞에서 독립 선언서를 결연히 낭독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일제히 불렀다.    


이렇게 발단된 3.1운동이 평양, 함흥, 원산, 대구, 부산 등 대도시로 번지더니 전국의 읍, 면 단위 농촌에까지 대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1운동은 식민통치에 대한 민족적 울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비폭력을 표방했는데 일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주동자를 검거해서 고문했다.  


이렇게 전개된 3.1운동에는 여러 가지 일화도 생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마을 주민을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자인하게 학살한 사실은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충청남도 천안의 아오내 장터에서는 17세의 유관순 학생이, 저 북녘땅 함경북도 명천군의 하가면에서는 15세의 동푼신(董豊信) 학생이 대한독립 만세를 주도한 사실도 특기할 사항이다. 이 두 여학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옥중에서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고 한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이 3.1운동 직후인 그해 4월 10일에 중국 상해에 모여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호(國號)와 헌법을 제정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의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5000년 동안 내려오던 군주제를 국민 주권의 현대적 국가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전개한 3.1운동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으니 그 영향이 국제사회에 바로 나타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지경에 이르자 전후처리(戰後處理)를 위해 열린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27일)에서 연합국 수뇌(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들은 일본 식민지로 있는 조선(朝鮮)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것이다.   만일 3.1운동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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