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그리움의 수명 그리고 그 무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그리움의 수명 그리고 그 무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

생각나는 사람입니까.


오늘도

누군가에게

그리운 모습을 지어 가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이 된 부인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젊은 노인>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았을 때 잘하지" 입니까.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가 잘했든지, 못했든지 그리움이고, 그 눈물을 멈출 수 없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 나는 정말 잘해야 하겠다." " 입니까.

아무리 다짐해도

그 누구도

후회 없는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저 그 순간의 최고이지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나의 장례는 호상이겠습니까.

몇 세에 돌아가시면 호상이겠습니까.


성도의 죽음은 모두 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을 때는 이 세상에서, 다시 일어날 때는 천국이면 어찌 이 땅의 죽음이 호상이지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기에 믿음이 적은 우리에게는 꿈같이 여겨질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 이상 다른 것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호흡이 끊어짐 없이 저세상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 무엇이라고 여기십니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둥바둥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여기기도 힘듦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아등바등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빚쟁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빚은 우리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 빚에 대해 인식을 하게 됩니까.

내가 내 죄를 알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 죄에 대해 모르게 됩니까.


<영적 건망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 빚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나의 교만이, 게으름이 충만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만 두려워하는 걱정으로만 사는 우리 모습이 드러날 때입니다.

우리는 허상은 간절히 구하지만, 실상은 등한히 하는 자임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가롯인 유다와 로마 병정이 왔을 때 그들의 하속의 귀를 칼로 베었던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그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야 할 때는 세 번이나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반대하는 자가 없을 때는 참으로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자 앞에서는 몸을 숨기는 삶을 살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들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책망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를 인정하는 이유는 자기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동질성 때문입니다.

실수로 인한 자기비판이 자기 연민으로 발전할 수 없다면 자기 포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그리움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떤 자를 그리워하고 싶습니까.

그리움이란 함께 하고픔이라고 정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립기는 한데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면 참으로 <어색한 그리움>으로 여겨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젊은이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낌은 왜이겠습니까.

장례식에는 참석하는데 함께 하기에는 버거운 이웃이 생김은 왜이겠습니까.


현실에 적응하며 잘 대처함의 능력이 떨어짐은 무엇 때문입니까.

스스로 나이 들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세상은 현실 안주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나 혼자만 복지부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변화에도 주저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보수주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보수주의는 긍정적 방향의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보수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바른 방향으로 지켜나가는 것이지 그 자리만을 지키는 복지부동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성도의 특징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엉뚱한 돌연변이로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돌연변이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도 거울을 봅니다.

 만족스럽습니까.

내 얼굴 중 어디가 제일 보기에 좋습니까.

 누가 나의 지금 모습을 그리워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누구나 그리워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단장하길 기원합니다.


보통 열렬한 사랑의 수명은 3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리워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낸 무뚝뚝하시던 아버지가 하소연을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그 동생들이 한 번도 그 묘지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묘지를 둘러보지 아니한다고 그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의 형편을 모릅니다.

그리움의 수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움의 무게에 비례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 중에 느끼는 그리움의 무게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서로 사랑함에 비례한다고 느껴집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관계가 주님 안에서 이길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13:34-35 KRV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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