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뜨거운 여름철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5장 13절 [개역한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충성된 사자는 먼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자기를 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보시기에 좋은 흡족함을 원하십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이열치열을 드리기에 분주하지만 진정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시원함,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아주 시원함임을 정확하게 말씀하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무슨 권리로 이렇게 높은 수준의 것을 성도인 우리에게 원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최선을 우리를 위하여 다 하셨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그 까닭으로 핍박받고, 갇히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정당성은 훼손될 수 없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그러한 충성된 사자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라고 하는데 이때 가장 핍박받은 자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중국의 기독교인은 더 이상 지상에서 예배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로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지하나 굴속에서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지하교회 교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인들의 카타콤의 삶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금 중국에는 삼자애국교회라는 공산당의 비호 아래 있는 기독교회가 지상교회로 있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직도 지하교회 즉,.언약교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유신론을 부정하는 중국 정부는 공산국가로서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지하교회의 예배 모습을 유튜버를 통하여 보면 그들의 열정이 성령의 인재 없이 이뤄진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들의 그 예배드림을 보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어서심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탈북자들을 통하여 북녘의 성도들의 상황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북녘의 보안원은 좋은 것을 나누기를 즐겨하는 자를 기독교인으로 보고 연행해 조사한다고까지 합니다.


그리고 도로공사나 건물을 지을 때 땅속에서 그들의 거처가 발견되기도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지 7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복음의 씨가 우리가 동토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자라고 있음을 보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핍박받는 그들과는 달리 예배드리기에 게으른 우리는 왜 날마다 얼음냉수가 아닌 뜨거운 물을 드리는 삶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후회를 자청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연약함만이 그 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이기는 많이 모이지만 중국의 삼자애국교히 처럼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가 아니라 거대한 공산당 앞에서 예배드림 같습니다.


우리 앞에는 무신론자인 공산당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허울 좋은 관용을 내세우는 기독교, 즉 A. W. TOZER가 GOD라는 저서에서 깨우쳐주는 경박한 그리스도인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지금이 <위기>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라 하심에 순종하는 듯한 모습은 지니지만 신령과 진정이 없다면 그들은 저 원형경기장에 모여 그리스도인들이 굶주린 사자에게 찢김을 당함을 환호하며 부르짖던 자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대로가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현실을 통탄만 하는 우리임을 고백합니다.


옛적에는 기독교인의 배타성(Exclusivity)을 거룩성으로 인정하는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관용 없음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지니는 배타성은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산은 것이 개혁이 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배타성은 오직 Godly가 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직 Godly에만 시원함을 느끼시는 제한성을 지니신 분이라고 선포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국회에서 거론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하는 기독교계에 위험성 높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유럽교회의 무너져가고 있음을 보면서도 자성과 개혁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는 자입니까.

지금 이시간 유럽 대다수 교회의 출석률은 5%에서 10% 정도라고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은 각종 다양한 시설로 전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망연자실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형의 것은 어차피 영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마지막 단원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5:37 KRV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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