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내 마음, 하나님 마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내 마음, 하나님 마음

내 마음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가운데 있다고 선포하고 싶습니다.


온 세상 천지 만물이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푸르름으로, 오곡백과로 노래하는 계절입니다.


과연,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음을 땅에 두시고 다스려 주심을 무지한 우리로서도 알게 하여 주심입니다.


이 새벽을 깨워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의 일어나는 시간은 모든 시각이 새벽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눈을 뜨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나의 일과를 누가 정합니까.

하루하루가 너무 바쁩니까.

왜 나만 이렇게 바쁜가 여겨지십니까.

오늘은 누구와 사귈까.

누구를 만날까.

계획을 세워보십니까.


우리가 애써 계획하지 않아도 뜻밖의 사람들과 만나게 됨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고 싶으십니까.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함의 복됨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 복됨이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게 합니까.

탈북한 북녘의 청소년들이 중국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맞이하고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북녘의 말씀을 모르며 주체사상에 세뇌되어 살고 있는 형제 자매였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의 고백과 간증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그들의 고백은 그냥 입술의 말에 머물지 않고 기어코 그 동토로 돌아가서 그자들에게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허다함을 들었습니다.

놀라울 따름입니다.

즉, 우리가 글로만 보아왔던 것을 생명으로 바침을 실천하는 이들이 이 시대에도 있음을 들을 때 우리의 빚짐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면 사육신과 생육신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단종의 억울한 폐위와 죽음에 대해 항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별히 사육신 가운데 성삼문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허벅지가 찔리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받으며 생명을 바쳐 단종에 대한 의를 죽음으로 지켰고 김시습을 비롯한 생육신들은 그 시신을 수습하고 세조를 섬기지 아니하며 사직하고 낙향하여 세조의 불의함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문득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더하시는 때가 우리가 이 땅에 거할 때인지 하늘에 있을 때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생육신으로 살다가 죽고자 합니까.

사육신으로 죽어서 살고자 합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까.

그런 것을 정해놓고 사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특별한 자들의 형태라고 여기십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것조차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장래를 자력으로 정할 수 없는 존재, 즉 아버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이가 아버지 하나님이심이 복됨임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명령에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해야함입니까.


마치 이방 여인이 그 자녀를 위하여 예수님께 간청하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오늘날도 북녘땅에는 기도에 따른 이적이 수없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대행군(1995년-1997년)을 지난 그들에게 죽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아직은 살아 있으나 굶주리게 하는 김정일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김복한이라고 불리는 탈북자 목회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으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우리를 위한 기도함으로 돕는지, 우리가 그들을 중보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그 우리를 위한 기도가 불경건이 풍성한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는 우리를 위한다고 여겨집니다.


노아 홍수가 임하기 전에 그들의 남은 날이 120년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신 우리의 남은 날이 아직 120년이나 된다고 여기는 우리는 아닙니까.


우리 마음의 둔함이 넘쳐남은 아직도 지면에 창일한 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7장 24절 말씀입니다.

“물이 150일을 땅에 넘쳤더라”

그리하여 아직도 그 방주 안에 갇혀 있는 우라는 아닙니까.


이미 물은 다 빠졌고,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지nt id='ul_17' color='green' class='ul' onclick='fShowHelp(17)'>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방주를 나와 땅을 경작하고 번성하여 말씀으로 정복하는 우리 되길 기원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드디어

방주에서 나와

또다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길

좁은 길을

노아처럼

묵묵히

기쁘게

멈춤 없이 걷는 우리를 상상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것조차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장래를 자력으로 정할 수 없는 존재, 즉 아버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이가 아버지 하나님이심이 복됨임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명령에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해야함입니까.


마치 이방 여인이 그 자녀를 위하여 예수님께 간청하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오늘날도 북녘땅에는 기도에 따른 이적이 수없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대행군(1995년-1997년)을 지난 그들에게 죽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아직은 살아 있으나 굶주리게 하는 김정일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김복한이라고 불리는 탈북자 목회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으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우리를 위한 기도함으로 돕는지, 우리가 그들을 중보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그 우리를 위한 기도가 불경건이 풍성한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는 우리를 위한다고 여겨집니다.


노아 홍수가 임하기 전에 그들의 남은 날이 120년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신 우리의 남은 날이 아직 120년이나 된다고 여기는 우리는 아닙니까.


우리 마음의 둔함이 넘쳐남은 아직도 지면에 창일한 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7장 24절 말씀입니다.

“물이 150일을 땅에 넘쳤더라”

그리하여 아직도 그 방주 안에 갇혀 있는 우라는 아닙니까.


이미 물은 다 빠졌고,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방주를 나와 땅을 경작하고 번성하여 말씀으로 정복하는 우리 되길 기원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드디어

방주에서 나와

또다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길

좁은 길을

노아처럼

묵묵히

기쁘게

멈춤 없이 걷는 우리를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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