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추석날 땅 따먹기 놀이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추석날 땅 따먹기 놀이

이성수(수필가·서북미문협회 회원)           

 

올해의 추석은 9월 10일이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위가 심했다. 이곳 시애틀에도 폭염이 찾아와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런 더위를 이기고 추석을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의 추석 생각이 났다. "더도 덜도 말고 추석 한가위만 같아라"란 속담처럼 추석 하루는 먹을 것이 넉넉하였다. 추석 하루만은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고, 송편과 시루떡 그리고 부침개를 배불리 먹어서 좋았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 애들을 집으로 불러 송편과 떡을 먹이곤 하였다.


지금 같으면 각자 자기 방에 혼자 앉아서 컴퓨터나 전자 오락기, 스마트 폰에 몰두할 나이인데 그 옛날 우리는 넓은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패를 갈라 흙을 만지며 여자아이는 공기놀이를, 남자애들은 딱지치기를 하였다.


여자애들의 공기놀이는 5개의 공기를 던지고 집으며 노는 놀이다. 게다가 공기놀이는 돌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었다. 바닷가에서는 고동 껍질이나 소라껍데기를 가지고 놀았고 콩, 살구씨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 뉴질랜드, 몽골과 같은 초원 지역에서는 양의 발목뼈나 등뼈로 공기를 만들어 논다고 한다. 결국 공기놀이의 공기는 주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공기 다섯 개를 바닥에 던져 흩어 놓고, 그중 한 알을 집어 위로 던진다. 그러고는 바닥에 있는 한 알을 집어, 앞서 던진 한 알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는다. 받으면 이기고 받지 못하면 진다. 지면 다른 팀이 대들어 도전하곤 했다.


한편 남자애들도 한쪽에서 딱지치기를 하였다. 

치는 방법은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진 아이가 딱지를 땅바닥에 놓으면, 이긴 아이가 자기 딱지로 땅바닥에 놓인 상대 딱지의 옆을 힘껏 내리친다. 이때 치는 충격과 바람의 힘으로 상대 딱지가 뒤집히면 이겨 따먹고 계속하여 딱지를 칠 수 있다. 그러나 상대 딱지가 뒤집히지 않으면 치는 순서가 바뀐다. 이때 제 딱지가 상대 딱지의 위에 얹히면 도리어 잃게 된다.


잠깐 사이에 공기놀이, 딱지치기를 마치고 '땅따먹기 놀이' 준비가 시작되었다. 

우리 마당은 추석 후에 바심할 것을 대비하여 일꾼이 마을 입구에 있는 고운 찰흙을 파다가 마당에 맥질을 하여 놓았기 때문에 방바닥보다 더 반들거렸다. 마당에 누어 놀다가 옷에 묻은 흙먼지는 일어서서 털면 되고, 손에 묻은 흙도 손뼉 치듯 딱딱 치면 말끔히 제거되었다. 이렇게 흙을 만지고 흙과 더불어 살아도 애들은 병이 나서 병원 한번 간 일이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요즘 중국서 날아오는 공장의 해로운 미세먼지도 그 당시는 하나도 없었다.


땅따먹기 놀이는 남녀의 구별이 없이 할 수 있다.

커다란 남자애가 뾰족한 막대기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넓은 마당에 길게 줄(線)을 그었다. 그리고 석 자 간격으로 표시를 해주고 그 안에 두 사람이 앉도록 하였다. 그 남자애는 짝꿍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땅을 빼앗는다고 땅따먹기 놀이의 요령을 설명해 주었다. 


드디어 둘이 짝꿍이 되어 땅 따먹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각 짝꿍이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기는 편이 오른 엄지손가락을 땅에 대고 손을 마음껏 펴 한 뼘 타원을 그린 넓이만큼의 땅을 빼앗았다. 진 사람은 앉아서 구경만 했다.


 아버지가 땅이 없어 남의 소작(小作)을 하는 나에게는 땅따먹기는 절실하였다. 땅을 많이 따서 소작을 면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나 뿐 아니라 대다수의 애들 집은 모두 땅이 없어 남의 집 소작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가위, 바위, 보의 소리를 외쳐가면서 한 평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한참을 땅을 따먹은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꽤나 많은 땅을 빼앗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계속 손을 내밀어 가면서 가위~, 바위~, 보~를 외쳐댔다. 나는 운이 좋아 가위, 바위, 보에서 많이 이겼기 때문에 땅을 딸 수 있었다.


어느새 짧은 가을 해는 기울어 서산으로 넘어가고 동구 밖 동산에 쟁반 같은 팔월 한 가위 보름달이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었다. 달은 지금 막 세수하고 단장한 누나의 얼굴처럼 곱고 아름다워 보였다. 애들은 한 평이라도 더 땅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누이와 같이 얼른 저녁 먹으러 오라하셨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나는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어느새 옅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어머니의 재촉이 심하였다. 이웃 어머니들도 애들을 데리러 나왔다. 드디어 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아!~ 죽을힘을 다해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딴 땅을 놓고 일어서는 나는 너무나 아까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저것이 모두 내 땅이었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없는 마당의 흙에 불과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땅 따먹으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애들로 붐비던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누나 혼자 집으로 가고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만 열심히 따놓은 땅에 어둠이 깃들면서 주인을 잃은 채 쓸쓸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땅따먹기는 놀이일 뿐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시던 내 이름이 허공 속에 메아리가 되어 들리는 듯하였다. 

지금 막 떠오르는 보름달의 은빛 가루가 주인 없는 빈 땅위에 쏟아졌다. 나는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누나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너! 빨리 오지 못하고 거기서 혼자 무엇하니?"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누나는 멍하니 서 있는 내 곁으로 와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나는 빼앗은 땅을 두고 억지로 그곳을 떠났다. 


희뿌연 보름달의 은빛 가루가 누나와 나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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