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한인로컬칼럼] 624. 하이에크의 자유화폐론 - 안상목회계칼럼
비트코인 옹호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제학자는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라는 설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여 주로 영국에서 일한 하이에크는 20세기 주요 경제학자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케인즈와의 공개토론으로 유명하다. 그 토론에서 케인즈는 줄곧 저축보다 소비가 중요하다고 했고, 하이에크는 소비보다 저축이 중요하다고 했다. 비트코인 옹호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유화폐가 바로 비트코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하이에크의 저서 1990년 증보판 지폐의 액면금액(Denomination of Money – The Argument Refined – 1990)에 보이는 자유화폐론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1. 어떤 사설 은행이 A 라는 신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한다.
2. 그 화폐의 가치는, 주요 실물 그룹의 가중평균 가치로 표현한다.
3. 발행은행은 A의 가치를 그 실물그룹 가치 가까이에 유지하기로 약속한다.
4. 발행은행은 기존 주요 화폐와의 환율을 명시하고, A의 보유자가 언제든지 그 명시된 환율에 환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5. 신화폐 A를 발행하는 절차는 환전과 대출 등 두 가지에 한정한다.
6. 신화폐 A의 남발로 인하여 A의 가치가 하락하면, 발행은행은 A를 구매하여 가치 하락을 막는다.
7. 다른 은행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화폐 B, C 등을 자유롭게 발행한다.
8. 이와 같이 생겨나는 수많은 화폐 중 가치가 가장 잘 안정되는 것이 살아남을 것이다.
하이에크의 자유화폐론을 형성하는 위 8개의 요소 중 비트코인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7번 하나뿐이다. 비트코인과 하이에크를 연결시키는 사람들은 단지 7번 하나만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상상의 세계를 펼친 듯하다. 하이에크식 자유화폐제도에는 발행은행이 뚜렷이 존재하는 반면 비트코인에는 그러한 존재가 없다. 하이에크의 자유화폐 구상에는 화폐의 가치 설정 및 유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비트코인에는 단지 전체 발행량을 한정하는 장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비트코인의 가치를 하이에크의 자유화폐론에서 찾는 것도 황당하지만, 하이에크의 구상 자체도 파고 들면 황당한 구상임을 알 수 있다. 하이에크는 화폐의 가치 설정에서 위 2와 4의 두 가지 다른 기준을 사용했고, 그 때문에 3과 4 두 가지 약속을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4에서 미화 달러와의 환율을 고정시켰을 경우, 미화 달러의 가치가 변하면 3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하이에크 이론이 아무리 수정되어도 성립할 수 없음은 위 6에 나타난다. 6은 “화폐의 양이 물가를 결정한다” 하는 화폐수량설에 근거한 구상이다. 지폐는 어음이기 때문에, 지폐의 수량이 많아졌다고 그 지폐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통화량과 물가와의 상관관계가 느껴지는 이유는 거꾸로 물가가 화폐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인과관계를 올바로 생각하면, 위 6은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칼럼 423호(프리드만의 화폐수량설)에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하이에크의 저러한 구상은 “화폐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경쟁자가 많을수록 품질이 우수해진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화폐를 어음이 아니라 상품, 즉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누구든지 화폐를 물건으로 보면 저와 같은 혼란에 빠진다. 하이에크의 사고방식을 따라서 화폐를 그 이름과 발행자에 따라 분류해 놓고 품질의 순서를 매기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최상: 여러 은행이 각각 다른 이름으로 발행하는 자유화폐 (하이에크의 구상)
제2: 여러 은행이 모두 같은 이름으로 발행하는 화폐 (미국 자유화폐 시대의 은행권)
제3: 일국의 중앙은행이 하나의 이름으로 발행하는 법화 (예: 미화 달러)
최악: 여러 국가의 중앙은행이 하나의 이름으로 발행하는 법화 (예: 그레이백, 유로)
위에서 본 바, 하이에크가 최상이라고 믿은 자유화폐는 뒤죽박죽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자유화폐는 어떠했을지, 그 내막을 다음 주에 들여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