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고향에서 듣는 가을의 소리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고향에서 듣는 가을의 소리

오래간만에 고향에 와 가을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집 근처에 있는 감나무 밑으로 갔다. 나무에 홍시가 많이 달려 있다. 감 따는 망으로 감을 따다가 잘못하여 홍시 하나가 땅에 철썩! 하며 가을의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금방 나무에서 딴 주황색의 먹음직하게 잘 익은 감을 입안에 넣었다. 미국에서 먹었던 그 홍시 맛이 아닌 특유의 풍미가 감도는 고향의 감을 오래간만에 먹어보니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실감났다. 나는 먹고 또 먹었다. 얼마나 이 홍시를 먹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전형적인 한국의 파란 가을하늘이 눈부시다. 낮에는 햇볕이 따끈따끈하다. 오곡백과 여물라고 화창한 좋은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정말 축복 받은 나라이다.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황금빛 벼를 비롯해서 콩, 수수, 팥, 녹두 등 여러 곡식과  과일나무를 보니 모두가 다 반갑다. 


  나는 친구를 만난 듯 한참을 곡식과 과일나무와 일일이 해후(邂逅)하였다. 그 순간 나는 가을의 소리를 고향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여러 개의 저마다 다른 가을의 소리였다.


 들 논에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벼가 바람에 부딪치며 내는 스윽슥! 스윽슥! 하는 부드러운 가을 소리와 콩깍지가 영글어 튀는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당가에 수줍게 피던 봉숭아 꽃 열매가 가을 햇볕으로 여물어 똑!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여름에 봉숭아꽃으로 물들인 소녀들의 손톱은 아직도 빨간데 모두 들에 나가 가을걷이에 바쁘다. 


 농부가 참깨 단을 막대기로 리드미컬하게 두드린다. 이 때 우수수! 하고 쏟아지는 참깨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장가소리 같아 졸음이 온다. 

 

 녹두 깍지가 햇살을 받아 비틀어지면서 멀리 튀는 툭! 툭! 하는 급한 소리가 들린다. 밤(栗)나무에서 알밤이 떨어지는 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숨어있던 다람쥐 한 마리가 얼른 떨어진 알밤을 물고 도망친다. 어디로 가는 걸까? 땅속 어딘가에 굴을 파 놓고 그 곳에 저장을 하는데 건망증이 심해 그 굴을 찾지 못한다. 할 수없이 또 다른 굴을 파고 그곳에 알밤을 저장하러 가는 건 아닐까.


 능금나무에서 빨간 능금이 탕! 하고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떨어지는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과나무에서 노랗게 익은 못 생긴 모과가 팡! 하고 떨어지는 가을소리와 고욤나무에서 고욤이 턱! 하며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통! 하며 떨어지는 소리,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면서 맴돌아 사뿐히 내려앉을 때 바스락! 하는 미세(微細)한 소리가 들린다. 


 억척같은 동리 아낙네가 커다란 돌멩이로 상수리나무 밑에 충격을 가할 때 후드득! 하고 상수리가 땅으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상수리를 주어서 묵을 쑤어 5일장에 내다 팔면 불티처럼 금방 팔린다고 한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속의 중금속을 상수리묵이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온갖 것이 땅으로 떨어진다. 왜 땅으로 떨어질까. 씨를 땅에 묻어 종족번식을 하기  위함이 아닐까. 


 땅에 떨어지며 내는 가을의 소리를 고향에 와서 들으니 정겹다. 그래서 가을을 떨어지는 계절 ‘Fall’이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가을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 소리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의 소리이다. 그런데 가을의 소리가 아닌 시끄러운 ‘콤바인(combine)’이라 부르는 농기계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이 기계는 일꾼 20명이 달려들어 벼 베고 탈곡하여 자루에 담는 일을 기계 혼자 하는 최첨단 종합수확기이다.   

 

 딱! 땅! 철썩! 우수수! 후드득!......하는 자연의 가을소리는 농기계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릴락 말락 하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 대신 기계소리만 욍! 욍! 크게 들린다. 이 소리는 소음을 내며 온 마을을 진동하고 있다. 


 그렇게 곳곳에서 들리던 고향의 가을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하나도 들리지 않는 걸까. 종일 듣기 싫은 소리만 나던 콤바인의 기계소리는 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멎었다. 

 고향마을은 고요하고 다시 평화스러운 가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고향의 가을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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