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팽창주의와 자유 4 (스탈린)
마르크스(1818-1883)와 레닌(1870-1924)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를 향해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레닌의 후계자들은 정확히 팽창주의의 길을 걸었다. 레닌이 뇌출혈로 입원한 1922년부터 정권을 잡은 스탈린(1878-1953)은 팽창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노선을 정반대로 뒤집어 엎은 것이다.
레닌은 우크라이나를 별도 국가로 인정했으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경제를 전횡하여 1933년에는 수백만의 우크라이나인을 굶어죽게 만들었다. 그 이듬 해에 1934년에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이후 스탈린은 혁명 동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한 다음, 1939년 8월에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독일이 폴란드의 서부를 침공하자 스탈린은 폴란드의 동부를 침공했다. 스탈린은 그 해 겨울 핀란드를 침공했고 (소위 겨울전쟁) 그 이유로 소련은 그 해 말에 국제연맹에서 축출되었다. 스탈린은 1940년 6월 발트 3국을 침공하여 병합해버렸다. 국제연맹이 망해가는 모습이다.
독일은 1941년 6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러시아 본토를 침공했고, 거의 동시에 앞 문단의 발트 3국을 점령해버렸다. 스탈린은 살아남기 위해 (레닌이 적대시하던) 미국, 영국과 한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10월부터 소련에 미국, 영국, 캐나다의 물자가 지원되었다. (그 이야기는 칼럼 752호에도 있고, 지금 쓰고 있는 이 시리즈는 그 752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진주만 공습은 그해 12월의 일이었다.) 이 숨가쁜 한 해의 일을 시기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1년 3월 미국의 Lend-lease Act 제정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
1941 년 8월 영국과 미국의 대서양헌장 서명
1941년 10월 미국, 영국, 캐나다의 소련 물자지원 시작.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스탈린은 미국의 물자 지원을 받았으므로 대서양헌장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서양헌장의 전모는 칼렴 773호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명 뿐이었다. 스탈린의 행동은 대서양헌장과 정반대였다.
스탈린의 추악한 내심은 대전 말기 극동에서 또 나타났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카이로회담에서는 스탈린이 빠지고 테헤란과 얄타의 회담에서는 장개석이 빠진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 회담은 일본과의 전쟁에 관한 논의였으며, 주안점은 청일전쟁과 그 이후의 영토 변화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한국은 독립국이었으므로, 거기서 한국의 독립도 결정된 것이다.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1941년 4월에 체결된 일소중립조약이 발효중에 있었으으므로, 카이로에서 소련의 이권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1943면 12월의 테헤란 회담과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은 독일과의 전쟁에 관한 논의이므로, 장개석이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그 두 희담에서, 스탈린은 카이로 회담을 존중하고 온전한 한 개의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때 잠시 언급된 신탁통치안은 분리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미국와 영국은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후 3개월 이내에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면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잃은 것을 모두 되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것은 사할린의 남반부와 쿠릴 열도와 요동반도의 일부를 의미했다.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2일 후인 8월 8일에 극동전투에 참가한 소련은 약속된 쿠릴 열도로 가지 않고 재빨리 한반도로 군대를 진입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전투지역이 아니었으므로, 그 곳으로 진격할 군사적 이유가 없었다. 또, 연합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로 진격해야 했다면, 그 일은 장개석 중국의 몫이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던 이 사태에 대응하여, 미국은 8월 10일 다급히 영관급 장교 두 사람을 파견하여 일단 38선을 그었고, 다음날 8월 11일 연합군사령부 제1호 명령 기안서에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 사령관에게 항복하라”고 썼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탈린의 상궤를 벗어난 군사행동 때문에 엉겁결에 만들어진 것이다. 소련은 일본이 항복한 후에야 쿠릴 열도로 밀고 들어가서, 러일전쟁 이전에 일본 소유이던 섬까지 털어버렸다. 항복 이후의 공격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으나, 스탈린의 어이 없는 행보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역사에서 독재자라 불린 사람들 중에는 레닌 같은 사람보다 스탈린 같은 사람이 더 많았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 헌법(Constitution of USSR 1936)에는 언론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나, 검열(censorship)에 의하여 현실의 언론활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스탈린 같은 독재자의 팽창주의 행위를 비판할 만한 언론은 존재할 수 없었다. 레닌이 자결주의를 존중하는 한편 언론을 탄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착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