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오늘도 나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오늘도 나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

지난 주일에는 마가복음 6장의 말씀을 통한 담임목사님의 강해 설교가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이란 주제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왠지 아직도 우리에게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이란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실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처럼 난폭하게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주 점잖은 모습으로 믿는척하면서 순종하지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처럼 말씀이 흔할 때는  아마도 태초 이래로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때를 맞추어 이뤄진 인쇄술의 개혁 발전으로 인하여 이제 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부족어로 인쇄되고 외쳐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외쳐져도 가르쳐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냥 소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빠르고 흥겨운 곡조에 익숙한 이에게 격조 높고 장엄한 클레식을 들려주면 지루해하며 나중에는 짜증까지 내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습니다만 또한 기뻐하지도 감동하지도 적용하지도 못하는 참으로 이상한 모습의 성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감동과 뜨거움이 없이도 말씀을 떠나지는 아니하는 그 지구력은 존경받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이단이 존재합니다만 솔직한 이단은 없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단의 조건은 이중인격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항상 자신이 더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 시대의 영지주의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아주 높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육적인 것을 더 탐하려는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가 이단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병났기를 원하고 더 잘 살기를 원하지만, 더 섬기려 함에는 여전히 부족한 종들, 아직도 배반하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아니 예수님 같은 자로 불리기를 원하고 바라고 소원하지만, 예수님처럼 사는 것에는 늘상처럼 육신의 연약을, 세상의 악함을 핑계 삼는 우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들으면 몸을 숨기고 싶음이 있습니다.

옛적에 자동차 범퍼나 뒷면에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는 것이 성도들의 유행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께서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그때 그 장로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자신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 모든 기독교는 교회당에서 십자가를 제거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그 목에 걸거나 문에 붙인 십자가를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 문양이 우리 세워준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성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성경 찬송 들고 주일날 교회 오기 운동을 장려한 적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전화기에 앱만 있으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의 목적은 내가 성도임을 표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리려는 방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물고기를 그리며 성도임을 알리며 주 안에서의 교제를 활발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장로, 목사, 집사인 것에 자긍심이 느껴지십니까.


처음 소개받는 목사, 장로, 집사에게서 어떤 신뢰가 느껴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 감정으로 기독교를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불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금도 감동하심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 누군가의 판단으로 바르게 정의될 수 없음입니다.

종교개혁이 500여 년 전에는 종교적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각자 개인에게 있어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리해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 시대가 거듭나야 하겠음을 참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말세지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하심이 바로 이때이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거나 핑계 댈 시간이 없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정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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