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노동지(老冬至) 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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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칼럼] 노동지(老冬至) 팥죽

노동지(老冬至) 팥죽 - 이성수

 

오늘 12월 22일이 동지(冬至)이다.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짓날은 팥죽을 쑤어 먹는 풍습이 있다. 동짓날이 음력 동짓달(11월) 초승에 들면 ‘애동지’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지 않는다. 만일 팥죽을 쑤어먹으면 어린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대신 팥시루떡을 해 먹는다. 


또 동지가 음력 11월 중순에 들면 ‘중동지’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다. ‘노동지’는 음력 11월 20일이 지나서 드는 동지를 뜻한다. 노동지에도 팥죽을 쑤어먹는다. 그래서 올해는 동지가 음력 11월 그믐이므로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 분들에게 팥죽을 쑤어 한 그릇씩 나누어 줄 때는 마음이 즐거웠다.


아내는 옛날부터 쑤어내려 오는 재래식 방법으로 팥죽을 쑨다. 이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팥을 물에 담가 불려서 팥죽이 완성되기까지 2시간도 더 걸린다. 팥은 한국산을 사야 맛이 있다. 


팥을 완전히 불린 뒤에 팥이 겨우 잠길 만큼 물을 붓고 센 불로 팔팔 끓인다. 처음 끓인 물은 버린다. 농약 같은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팥의 떫은맛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첫 팥물을 따라 버리고 물을 부어 센 불로 한소끔 끓인 후 약한 불로 오랫동안 끓인다. 이때 나무 주걱으로 서서히 저어서 눋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젓는 것도 힘이 든다. 꼭 지켜 서서 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젓는 일은 내 몫이다. 양이 많을 때는 팔이 아프다. 팥이 호물호물할 때까지 푹 고아야 한다. 


다 곤 후 식힌 다음 체에 밭쳐 손으로 으깨어 완전히 껍질을 제거하여 버린다. 이 작업이 힘든다. 체에 밭친 팥물은 가만히 놔두면 앙금은 가라앉고 윗물만 남는다. 이때 윗물을 따라 새알심과 물에 불린 쌀을 넣고 새알심이 둥둥 뜰 때까지 끓인다. 여기에 가라앉은 앙금을 붓고 잘 저으면서 되직하게 다시 끓이면 팥죽이 완성된다.


새알심은 찹쌀가루를 끓는 짭짤한 소금물로 반죽하여 지름 1cm 정도의 크기로 새알처럼 둥글게 빚어 만든다. 나는 아내와 같이 새알심을 만들었다. 적당히 배합한 찹쌀가루를 조금 떼어 양 손바닥으로 비벼 새알만 한 크기로 둥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내가 만든 새알심은 크기가 똑같은데 내가 만든 것은 컸다 작았다 일정하지 않았다.


팥죽을 다 쑤는 데 적어도 2시간도 더 소요된다. 이 팥죽이야말로 입에 넣으면 팥 특유의 향과 말랑말랑한 새알심이 입 안에서 스르르 녹는 부드러운 촉감과 걸쭉한 팥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전통 팥죽 맛이다.


이웃에 사는 할머니가 팥죽을 가지고 와서 “우리 손녀 애가 쑨 팥죽이요. 신식으로 빨리 쑨 것이니 맛 좀 봐요.”


이 신식 팥죽은 바쁜 생활에 쫓겨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재래식 방법으로 쑬 수가 없기 때문에 빠르고 쉽게 편법으로 쑨 팥죽이라 했다. 


즉 팥을 불려서 믹서로 갈고 새알심도 없이 쌀만 넣고 죽을 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입안에서 느끼는 부드러운 촉감도 없고 팥 껍질 때문에 입안에 까칠까칠한 느낌만 있지, 깊은 맛이 없다. 진짜 감칠맛 나는 팥죽을 쑤어먹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림으로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것은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먹거리는 대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된장은 콩을 삶아 메주를 쑤어 4개월 이상 띄운 후 장을 담가서 먹기까지 9개월 이상 걸려야 하고, 고추장은 4개월 이상의 발효 기간을 거쳐야 제맛이 난다. 또 김치도 담근 지 최소한 20일 이상 땅속에서 발효 숙성시켜야 김치 맛이 난다.


호박죽은 늙은 호박을 반으로 잘라 씨를 제거한 후 썰어 죽을 쑤는 데 1시간도 더 걸리고 곰탕도 2시간 이상 뼈를 고아야 제맛이 난다.


젊은 세대가 개량식으로 쑤었건, 아내가 전통 방식으로 쑤었건 간에 맛에 상관없이 팥죽을 먹으면 팥은 신진대사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웰빙음식이다. 팥이 혈액 속에 쌓여 있는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피를 맑게 하는 청소부 역할을 한다. 우리 조상들은 현명하여 팥죽을 먹음으로 겨울 동안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였다. 


할머니는 동지팥죽을 쑤는 날이면 팥죽을 벽과 문설주에 뿌리셨다. 

“할머니! 왜 팥죽을 뿌려유?” 물으면 

“팥죽의 붉은 색이 액운을 물리친단다.” 하셨다.


할머니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성경 출애굽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기(출애굽) 직전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출입문 인방(人枋)에 발라 죽음의 재앙을 면했다. 


팥죽을 문설주와 벽에 뿌리는 우리의 옛 풍습이 성경과 같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팥은 붉다. 팥죽도 붉은색이다. 교회 강대상이 붉은색이 많다. 마귀가 근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붉은색은 황제(皇帝)를 의미한다. 궁전과 옥좌는 붉은색이고 황제의 의상도 붉은색이다.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붉은 경기복을 입고 뛸 때 붉은 악마 응원을 하여 승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교통신호에서 빨간색은 오지 말라는 뜻이다. 빨간색은 비 오는 날이나 안개 낀 날에도 어느 색보다 멀리 뚜렷이 보인다. 이 불이 켜진 이 시간부터 당신이 건너려는 길에는 사고위험이라는 악귀가 있으므로 정지하라는 메시지다. 차가 고장이 날 때 비상등이 붉게 들어오는 까닭도 위험하니 빨리 조치하라는 뜻이다.  


아기를 출산하면 금줄에 붉은 고추를 다는 데 역시 고추의 붉은 색이 액운을 물리치기 위함이요 심지어 장을 담을 때도 붉은 고추와 대추를 띄운다. 


오늘은 동짓날이다. 해가 제일 짧아 낮 4시면 어둡기 시작한다. 충청도 사투리로 “해 다 갔유”라고 한다. 이제 동지(冬至)가 지나면 이틀에 5분씩 해가 길어진다. 이를 비유하여 동지가 지나면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진다고 한다.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동지가 작은설이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금방 세모(歲暮)로 줄달음칠 것이다. 시편 기자 모세도 세월의 빠름을 “우리가 지금 날아간다”고 하였다. 세월이 빠름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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