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고 동열모 회장의 소천 소식을 듣고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고 동열모 회장의 소천 소식을 듣고

희망찬 새해 계묘년이 막 시작되는 1월 5일 저녁에 카톡으로 동열모 문우의 아드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저는 동열모님의 아들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1월 3일 편안히 소천하여 오늘 장지에 모시고 지금 연락을 드립니다. 97세까지 잘 지내셨지요. 옆에 계실 어머님 없이 저의 아버지는 정말 혼자 잘 지내시다가 힘이 빠지면서 며칠을 굶고 편히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나는 이 비보를 접하고 지난 세모(歲暮) 때 미디어한국에 기고한 <동열모의 세상 보기> ‘세모의 명상’에서 나는 8.15세대로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살아왔지만, 오히려 소중한 삶의 지혜를 터득한 그 세월이 고맙다고 말했었는데 소천하였다니 영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 동열모 문우가 역이민 송별회 때 막걸릿잔을 건배하면서 건강하게 살자고 9988234 즉 "99세까지 88(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4일 만에 콱하고 죽자"라고 외쳤는데 10년 후에 고 동열모 문우가 그대로 실천했다. 3년만 더 살면 100세인데 말이다. 대개 나이 들면 아픈 곳이 많은데 동 문우는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이 살다가 2~3일 앓고 4일 만에 세상을 떠나갔으니 이 또한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동 문우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그 습관이 칼럼을 쓸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동 문우가 25년간의 미국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 그와 석별의 정을 나눴던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페더럴웨이 창고 식당에서 페더럴웨이지역 한인 단체들이 준비한 송별식이 열렸었다. 페더럴웨이 한인회를 중심으로 페더럴웨이 통합한국학교, 페더럴웨이 한인학부모협의회, 상록회 등의 회원들이 참석해 막걸릿잔을 나누며 “한국에 가셔서 120살까지 만수무강하면서 후손들에 모범이 됐던 열정과 풍류, 지성과 지혜의 삶을 이어가시라”는 덕담과 함께 감사패를 증정했었다. 


박영민 페더럴웨이 통합한국학교 이사장을 비롯해 고경호, 김용규, 이희정, 김재욱 전 현직 페더럴웨이 한인회장은 물론이고 쉐리 송, 오시은씨 등 한인 1.5세에다 상록회를 이끌고 있는 남성삼 회장이 자리를 함께 했었다. 조승주 전 타코마 한인회장도 참석해 늘 존경해왔던 동열모 회장님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었다.


서북미문인협회(회장 지소영)도 다음 날 밤 페더럴웨이 한인회관에서 송별 모임을 가졌었다. 심갑섭 전 회장은 격동 속에 살아왔던 동열모 문우와의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이별 시를 직접 헌시하였다.


한인사회가 그의 이별을 남달리 아쉬워하고 있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삶과 자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과 ‘아름다운 노년’으로 존경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자유의 품을 찾아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었고 1957년 현재의 농촌진흥청인 당시 농사원에 특채로 채용됐다. 한국전쟁 이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미국 원조를 통해 만들어졌던 농사원이 출범한 지 2개월 뒤에 합류해 사실상 창립멤버였다. 


그는 32년간 근무하며 한국 농촌발전의 획기적 사업이었던 ‘4H’와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공로로 1979년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을 받은 그는 공보관 등을 거쳐 1988년 정년퇴임을 한 뒤 파키스탄 정부의 발전 프로그램을 돕는 컨설턴트로 활동했고, 1991년 셋째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 이민의 길에 올랐다.


그는 그 후 노인회인 상록회장직을 맡아 지도자로 나서 “노인들도 받기만 하지 말고 줘야 한다”며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고 나는 감사직에 선출되어 그를 도와 상록회 발전에 봉사하였다.

또한 동 회장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애틀지역 주간지 등에 칼럼을 꾸준히 써왔다.

한미연합회 워싱턴주 지부(KAC-WA) 등이 한국어 선거 책자를 추진할 때 시니어 대표로 나가 연설하는 등 한인들이 주류사회에서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페더럴웨이에서 25년 살다가 귀국하게 됐는데 그동안 함께 했던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라며 “미국에 사시는 한인분들은 투표에 많이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될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둘째 아들 집과 청평 쪽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지내왔다. 

소천 소식이 알려지자 서북미 문인협회원들은 모두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표했다. 


김미선 신임회장은 다음과 같이 고인의 명복과 유가족을 위로하였다.

“삼가 고인께서 하나님 곁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유가족들께서도 주님 안에서 소망과 위로를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라디오한국 공모전에 뽑혔을 때 한걸음에 달려오셔서 축하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천국에서 우리 모두 만날 날이 있음을 소망해 봅니다.” 


심갑섭 전 이사장은 “참으로 명품 인생을 살아오신 존경하옵는 동열모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젊은 열정으로 살아오신 ‘영원한 젊은이’ 동열모 선생님께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모두의 마음을 담아 명복을 빕니다. 편히 잠드소서.”


지소영 전 회장은 “동열모 선생님의 하모니카 연주 소리가 귓가에 맴돕니다. 고국으로 떠나가실 때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유가족분들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명복을 빌었다.  


상록회 정영옥 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노인분들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을 위로하였다. 그와 동고동락했던 노인분들이 많이 타계하였다. 정영옥 회장은 소천 소식을 듣고 명복을 빌며 “우리 상록회 97세 동갑례 회원이 3분 계신 데 임병호 회장님은 3년 전에 소천하셨으며, 이번에 동열모 회장님이 가셨고 조혜란(여) 회원 한 분만 남아 계시다”라고 말하며 건강을 당부했다.


동열모 회장은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그는 우리 서북미 문인협회를 음으로 양으로 성원해 주었고, 상록회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세상을 떠나갔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삶의 열정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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