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 2

전문가 칼럼

[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 2

지난 주 칼럼에서 본 바, 아담 스미스는 노동가치설에 해당되는 말을 한 적이 있으나 늦어도 산업혁명 이후에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생산은 자본과 노동의 합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나아가, 만일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온다면, 자본가는 이익을 누릴 수 없을 것(1)이라 했다. 


리카르도는, 모든 생산수단도 노동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으니, 결국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오는 것(2)이라 했다. 이 말은, 자본가의 몫은 자본가가 가지고 가야 하나, 그 자본가의 자본도 과거 그 누군가의, 예를들면 자본가 부모의, 노동에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지난 주 칼럼에서 본 바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은 노동이나 노동으로 인한 자본 말고도 많이 있었으나, 리카르도의 학문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두 가지 제품의 가치를 비교하기 위해서 그런 논리를 잠깐 사용했을 뿐이며, 비교 대상인 두 개의 제품에는 다른 모든 것은 똑 같이 주어졌다고 가저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어떤 요인의 경제적 약할을 분석할 때는 거의 언제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하는 전제가 붙는다. 리카르도가 노동시간 운운할 때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안았다고 해서 지난 주 칼럼에서 본 그 모든 진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리카르도의 (2)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천하만물의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스미스의 위 (1)번을 붙잡고,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오는데도 불구하고 자본가가 이익을 누리는 것은 노동착취 때문이다(3) 하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의 (1), (2), (3)번을 말만 붙잡고 늘어지면 일견 놀라운 삼단논법처럼 보인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다음 단계의 삼단논법을 편다. 자본은 이익의 축적이다(4). 고로 (5) 모든 자본은 착취의 결과다(5)까지 간다. 이렇게 되면 (3),, (4), (5)번이 삼단논법을 이룬다. 

저러한 바탕 위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자본재와 천연자원까지를 모든 노동자들이 공유한 상태에서 모든 물품을 공동소유로 생산하면, 모든 생산물의 가치를 노동시간에 따라 나누는 것에 상당한 공평성이 있다(6)는 방안을 창출한다. 


이것이 고타강령비판의 안로분배다. 

줄친 (6)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모든 재산을 기존 소유자들로부터 빼앗아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보고, 공산당선언(1848)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In one word, you reproach us with intending to do away with your property. Precisely so; that is just what we intend. 한 마디로, 우리가 귀하들의 재산을 없애버리려 한다는 이유로 귀하들은 우리를 비난합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의도입니다.”


빼앗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은 위 (5)번에서 요약되는 착취이론이다. 그러나,  만일 노동 아닌 것에서 가치가 창출딘더면. 즉 위 (2)번이 말 그대로가 아니라면, 마르크스의 논리는 무너진다. 지난 주 칼럼(802호)에서 본 바, 노동 아니면서 가치를 던져주는 것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 모든 것의 원천은, 가치를 알아볼 수 없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인간의 전체적 또는 개인적 능력이다. 전체적 능력이 창출한 것, 예를 들면 언어와 문자를  같은 것은 본래부터 만인 공동의 소유다. 


개인적 능력의 결과, 예를 들면 저작물 같은 것은 만든 자의 선택에 따라 일정 기간 개인의 소유로 있다가 나중에 만인 공동의 소유가 되기도 하고, 처음부터 만인공동의 소유가 되기도 한다. 마르크스 사상의 문맥에서 이러한 모든 것들의 공통적 특성은 “생산자들의 노동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  기초적 농사 기술은 신식기시대부터 만인 공동의 소유가 되었다. 


농지에는 주인이 있고 농사에는 농민의 노력이 들어가지만, 기초적 농사 기술 그 자체는 공짜로 주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때때로 걸식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유산에서 걸식자 몫만큼만 얻어가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자본이나 노동이나 두 가지 모두를 제공하든, 자본도 노동도 제공하지 않든, 단지 사람이기 때문에 챙길 수 있는 “몫”은 이렇게 존재한다.

 

고타강령비판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의 분배 방식에는 “사람은 노동하기 때문에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앞 문단은 이와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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