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마음 씀씀이(CARING)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마음 씀씀이(CARING)

우리는 사람들의 돈 씀씀이를 보면서 상대에 대해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재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곳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곳이 이 땅이면 그 재물은 근심되고 ,  그곳이 하늘이면 긍휼,  평가,  사랑이 된다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곳간에는 좀과 녹이 번성하게 되기도 하지만, 하늘 곳간에는 쌓아두어도 안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 씀씀이는 마음 씀씀이와 동의어로 사용해도 오류로 표시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시간의 연금술이라는 말도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는 것이 귀한 일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가 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그때가 지금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때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어떤 이는 그때가 이미 지나갔다고도 여깁니다.


물론 우리가 그때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자유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그 모든 생각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우리의 자유의지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계라는 대전제[大前提  a Major premise]속에 거함을 부정할 수 없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존하는 영생을 논해도 그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알 수 없음입니다.


이 땅에 발을 대고 호흡할 수 있는 기간은 인류 누구에게나 제한됨이라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므두셀라의 965세도 허락된 일정 기간 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호흡이 허락된 인생이 귀중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과연 이 땅에서의 삶이 영생을 좌우한다고 여기십니까.

영생을 위한 이 땅의 삶이 지옥 같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그런 자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는 천국을 위해 어떻게 원하고 바라고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완전히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권능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피를 홀리실 수 있었겠습니까.


성부께서만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 아니시고 성자께서도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심에도 말입니다.

과연 순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성부에 대한 믿음도 순종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순종과 행위의 차이는 있다고 여겨집니까.

순종은 행위일 수 있지만, 행위가 모두 순종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됩니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씀도, 마음을 쏟음도 그 근저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면 결국 이 땅의 곳간에 쌓는 행위일 뿐 순종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우리의 실수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순종과 행위가 구별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종이라 여기며 한 열심히 땅의 행위에 머물러 있을 때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라 여기며 한 열심히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일 때가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종은 행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 씀씀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


우리는 마음먹은 대로 행위를 진행할 때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잦은데 우리는 그 까닭을 너무나 잘 아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먹고 계획할지라도 이루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직이라는 말도 함께 연상됩니다.

세상이 지으신 이의 것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어본 경험도 없고 지을 수도 없는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헛된 주장함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 더불어 삶이라는 단어의 사용도 일면 부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눔이 아니라 그냥 함께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우리가 연약하여 자기의 분량을 넘어서려 할 때에 갈등, 증오, 시기가 생기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평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면서 섬김, 봉사, 헌신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것이 헌금이란 말로 쓰인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렇습니다.


연보라는 단어가 합당함입니다.

왜냐면은 연보의 뜻은 돈을 낼 때 생색을 내거나 다시 회수를 기대하거나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연보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림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참으로 빡빡한 세상이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이길 기원합니다.

좋은 마음 씀씀이는 선한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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