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대충과 적당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대충과 적당

세상을 사는 우리의 태도를 객관적 위치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은 대충 살아도 될 정도로 만만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다고 우리가 안달한다고 뭔가 달라지겠습니까.

삶의 여정 가운데서는 아무 것도 우리의 미래를 단정하며 도출해낼 수 없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로 잰듯이 살려해도 도처에 웅덩이와 늪지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충 살려고 하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것이 또한 세상살이임을 토로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그저 편안히 살려고 도전해보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만만치 않음입니다.

우리는 어느때를 편안하다고 정의합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세 가지를 우리는 ‘의식주’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먹는 것이 급박한 북조선에서는 ‘식의주’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북에서 피난하여 오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전쟁을 경험한 분들이라 먹을 것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웃 대접하기를 특별히 즐거워 하셨습니다.

배고픈 앞에서는 금덩이도 아무 소용없었음을 몸으로 경험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배가 부르기만 하면 다 형통이라고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불러 지면 인간의 간사함이  요동칩니다.

요즘 세대는 어떠합니까.

명품이 먹는 것보다 앞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외모에 치중함도 명품을 지니는 것에 못지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고 싶지 않으싶니까.

오늘의 현상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저 명품만큼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입니다.

아니 그 명품보다도 영향력을 상실한 말씀이 되게 한 죄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한들 말씀의 가치가 훼손될 리는 없습니다만 이런 현상이 참담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부자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부자의 옷장은 무슨 차이로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성도라는 말은 구별됨을 의미하는데 무엇이 그 구별을 나타냅니까. 

성도는 주일에 교회 모이고, 이방인은 극장이나 도박장에 또는 경기장에 모이는 차이 외의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한때 어떤 목사님께서 교회는 수백 명이 모이고 경기장에는 수만 명이 모이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가 복됨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여서 복된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충분히 받는다고 하기는 하는데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구별됨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찬송을 하고 말씀의 향연을 펼칠 때는 회개도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삶에서는 위로와 권면, 용서와 사랑의 말에 인색함은 왜 이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까.

우리가 아직 어디를 온전히 건너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니,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어리석고 무지하여 그 보혈의 공로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보혈을 지났다고 찬양만 하고, 아직 그 보혈에 입성하지도 못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만일 보혈를 지났다고 확신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보혈을 건넌 것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신기루 보혈입니다.

보혈의 모형만을 체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상 대충 살면서도 적당히 살면서도 최선이었다고 주장한 무리가 거의 모두인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탈북자들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와 태국의 치앙라이까지의 일만 킬로미터가 보혈의 강이라고 여기고 싶을 때도있습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다고 간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대충이나 적당이라는 단어는 없고 오직 절박이라는 단어밖에 없었음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언제나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혈유병 여인의 심정을 그들은 모르지만 그들은 똑같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하나님께 살려 주심을 간구했다고 하는 간증을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는 크게 상관하지 아니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어떤 장막이라도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인 것과 같음입니다.

오직 신령과 진정의 전인 우리 마음이 성령의 전, 곧 성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보좌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셨는지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없이는 그 누구도 거룩 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부를 수 없음입니다.

우리는 그 부름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만 오직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누가 부르는지 아실 수 있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대충이나 적당은 있을 수 없고 오직 신령과 진정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 찬양, 경외, 존귀,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령과 진정의 섬김이 겸손이 되길 간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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