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어머니 사랑해요.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어머니 사랑해요.

이성수(수필가)


어머니는 내가 17살, 고2 때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42살이셨다. 생후 96일의 젖먹이와 6남매 그리고 환갑을 훨씬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두고 세상을 떠나가셨다. 암과 같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가신 것도,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6.25 전쟁은 낙동강 전투까지 밀리고 있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대적할 수 없을 만큼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였다. 공산군이 폐주할 때 지방 빨갱이한테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학살로 돌아가셨다. 우리 앞마을이 남로당수 박헌영의 고향이라 지방 공산당원들이 완장을 차고 서슬이 퍼렇게 설쳐대었다. 지방 빨갱이들은 우익(右翼)파들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살생부를 만들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셨고 초등학교 후원회장이시고, 아버지는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D-데이 날 어른들은 산속 친척 마을로 피란 가셨다. 밤에 우리 집은 어머니만 어린 애들을 데리고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와 나와 동생들은 이웃집에 피해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난 가실 때 어머니보고 

“어미야! 밤에 위험하니 애들 데리고 다른 집에서 피해 있어라.” 

라고 하신 말씀만 들었어도 사고를 면했을 것이다. 또 어머니는 어른들 붙잡으러 왔다가 안 계시면 그냥 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음력 8월 16일 대낮 같은 달이 서산에 질 무렵이었다. 10여 명의 완장 찬 지방 공산당들이 살생부 인원들의 집을 수색하여 집에 없으면 부인을, 부인이 없으면 자녀를 체포하여 지서로 연행하였다. 우리 동네에서 7명이나 되었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양민들이 지서 뒷산에서 총살로 학살당했다. 다음날 어머니의 시신을 집으로 모시고 왔다. 장례날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나왔다. 집은 쑥대밭이었다. 


여동생이 14세이고 할머니가 연로하셔서 주부 대신 집안일을 맡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생후 100일도 안 된 젖먹이가 배고파 울어댔다. 동네 젖먹이 엄마들이 앞을 다투어 젖을 먹여 주었다. 낮에는 젖동냥을 해서 먹이지만 밤에는 굶었다. 배가 고파 울 때 식구도 모두 울었다. 할아버지의 아이디어로 미꾸라지를 잡아 그걸 고아 먹였다. 그 해는 논도랑에 미꾸라지가 풍년이었다. 밑의 동생 둘을 데리고 삼태그물로 미꾸라지를 잡아오면 할머니와 누이동생이 고아서 이유식으로 먹였다. 


그 당시 미꾸라지는 잘 먹지 않는 천한 물고기였다. 그러나 한약에 일가견이 계신 할아버지는 미꾸라지의 영양가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아기의 이유식으로 먹였다.

미꾸라지를 이유식으로 먹고 자란 동생은 젖을 먹은 아이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자랐다. 지금 나이가 73세이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참외가 먹고 싶으면 ‘서리’를 하였다. ‘서리’는 아이들이 남의 집 참외나 수박, 콩을 몰래 훔쳐 먹는 것인데 주인에게 들켜도 그 당시는 애들 장난으로 알고 별로 혼내지 않았다. 


그러나 2번 이상을 같은 장소에서 서리하다 발각되면 크게 혼을 당했다. 나는 또래 애들과 함께 참외 서리를 하다가 들켰다. 한 번 하면 그냥 용서되는데 2번째 서리라 꾸중을 듣고 원두막 주인은 부모님 모시고 오라 하였다. 어머니가 원두막으로 불려가셨다. 원두막 주인은 어머니 앞에서 혼을 내고 다시는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갈 때 주인아저씨는

“얼마나 참외가 먹고 싶으면 서리까지 하겠느냐?”


라며 참외 3개를 따 주고 동생들과 같이 먹으라 하였다. 어린 나이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나는 참외를 받아가지고 꾸뻑 배꼽인사를 하고 어머니 뒤를 따라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참외가 먹고 싶으면 엄마에게 말하라. 서리하지 말고….”

나는 어머니의 준엄한 말씀에 아무 말도 못 했다.                        

며칠이 지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대청마루에서 참외 냄새가 진동했다. 어머니는 

“요전에 참외 서리한 네 친구들 모두 데리고 오너라”


대청마루에서 때아닌 참외파티가 벌어졌다. 나는 목이 메여 참외를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집안이 어려웠다. 남들이 보리를 주고 참외와 바꿔 오는 게 부러웠다. 아들 기(氣)를 살리려고 쪼들리는 살림에도 참외를 사 온 어머니의 아들 사랑을 그때는 몰랐다.


간식거리가 귀하던 때 꿀이 제일 먹고 싶었다. 꿀을 할머니는 단지에 넣고 천장 높은 곳에 두셨다. 할머니가 안 계신 날 그걸 내리다가 놓쳐 단지가 박살 났다. 할머니의 회초리가 나의 장딴지를 때려 피가 날 때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어머님! 대신 제가 맞을께유.” 

하고 치마를 올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어머니는 새벽에 우물가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 꽁보리밥 대신 도시락을 싸주셨다.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갈 무렵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려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보리밥 대신 앵두가 가득하였다. 남 보기에 창피하여 얼른 닫고 말았다.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마침 일본 담임선생님이 나의 모습을 보고 내 곁에 와서 

“ 미야 모도(宮本)야! 왜 점심을 안 먹고 울고 있니?‘


하며 도시락을 여셨다. 싱싱한 핑크빛 앵두가 가득한 것에 놀라

“야! 이것 귀한 앵두 아니니? 난 앵두를 좋아한다. 내 도시락하고 바꿔 먹자.”

선생님이 주신 흰쌀밥 도시락과 찬합통의 계란말이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창피하게 앵두를 싸주었다며 울며 대들고 저녁을 굶고 잤다.


잠에서 깨어나 부엌 쪽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숨죽여 울고 계셨다. 내가 속을 썩여 드려 울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따라 울었다.

이런 어머니를 생이별하여 사랑해 드리지 못하고 속만 썩여 드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끌려가시던 음력 8월 16일 새벽달이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 추모식 날이면 달을 향해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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