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명품 신앙입니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명품 신앙입니까

우리는 어떤 것을 명품이라고 합니까.

이름이 있으면 명품이고, 유명하지 않으면 졸작입니까.

명품의 특성은 품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왜 명품을 추구합니까.

명품 가방이나 옷, 신을 착용하면 기분이 좋아집니까.

명품은 마약입니까.


웃음이 명품인 사람은 어떤 이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예화 가운데 The Power of Smile이 있습니다.

“Guidepost”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어떤 이가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띠고 신호대기 중인 길 건너편에 서 있습니다

그때 마침 자살을 결심한 한 젊은이가 세상을 비관하며 차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이의 미소를 보고 괜한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그 미소의 까닭은 알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죽는 일이 그리 급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미소 짓는 이를 찾아가 왜 그렇게 웃는지를 찡그린 얼굴로 따져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구원받은 이의 모습으로 그 젊은이에게 영생의 길로 안내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소가 죽을 자도 살리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명품 신앙이란 즐거워하는 이와 함께 웃어주고 슬픈 이의 마음에 동참하여 주는 것입니다. 웃음을 전염시키는 능력이 명품인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죽을 자도 살릴 수 있음입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찡그릴 수 있는 힘센 장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장대해도 그 어린아이의 까르르 앞에서는 그저 무너질 따름입니다.

같이 웃어준다고 지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상 웃는 신앙인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세상일에 뭐 그리 심각함이 필요 없다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만사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명품신앙인은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이미 대가 없이 구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명품 신앙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그렇게 살 자유가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정의되어 있습니까.

말세에도 명품 신앙인이 되는 것이 성도에게 허락되어져 있다고 합니다.

요엘서 2장 28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내가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겠다

너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고

너의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구분하는 소년, 노인, 청년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등하게 Babysitting 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지난 5월 19일 72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팀 켈러 목사님은 (Redeemer presbyterian church) 췌장암을 치료하는 그 2년 동안의 기간을 더 행복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오히려 병이 없었던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변에 말하여 왔다고 합니다.

죽음이 임박해서는 주님 앞에 가는 이 시점에서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고 가족들에게 말하였다고 가족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이 명품인 것은 그의 수많은 설교가 은혜로워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죽음의 순간에 보인 의연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명 설교자가 많습니다만 죽음의 순간까지 아름다운 고백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자는 그리 많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음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지만 남은 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과 계속 논쟁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변증해야 하는 소명을 지닌 

우리에게는 큰 아쉬움 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는 살아서는 무척 고독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포스터 모더니즘의 세상에서 만일 고독하지 않은 성도가 있다면 그의 신앙함은 졸작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문득 다윗의 칠십 평생이 떠오릅니다.

그가 지은 시편 23편은 그의 전 생애를 담은 찬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으로 떨며 걸어갈 때 어디선가 아버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타났고, 그가 원수들 앞에서 조롱당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이긴 자에게 허락하시는 큰 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게 하실 것을 믿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독생자의 십자가로 대속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보다는 못한 보살핌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라 여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모든 일이 우연일 수 없고 당연하였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민 가운데 기름부으셔서 그 이름을 기억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었는지는 확실히 아는 자의 신앙함이 명품 신앙일 수밖에 없음입니다.


또한, 어디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신앙이 육신에 속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연이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도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오직 영원할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의 신앙함이 명품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 경외, 존귀와 영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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