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노련한 성도입니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노련한 성도입니까

우리는 노련한 성도입니까.

나이가 들면서 노련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노련함이란 신사답다는 말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옛적의 영국 신사 같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양보함, 서둘지 않음, 약속을 잘 지킴, 위험을 회피하지 않음, 단정함, 일구이언하지 않음, 친절함 등 좋은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에 잘 차려입은 남자들을 보면 영국 신사 같다는 표현을 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 떠오를 무렵, 정원에 가득한 꽃들을 보면서 내 마음도 그 꽃내음과 화려함에 물들게 됨을 느끼며 역시 어색하지 않음, 즉 자연스러운 노련함이 타인을 즐겁게도 복되게도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그 노련함에 온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사에 어설프기만 한 우리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그 친숙함 때문에 노련함의 효과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숙함을 핑계로 게으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미숙함이 타인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음입니다. 우리의 어설픔도 성급함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서두름, 우리의 온갖 핑계 댐, 자주 약속을 어김도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련함이란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약 10년간의 교편생활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렇게도 하고 싶어 하던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노련한 선생님이란 많은 것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즐겁게 공부하도록 동기를 부여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련함이란 솔직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그 명성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검찰이나 경찰에서 그 증거를 찾아내기까지는 숨기려 하기 때문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노련함이란 솔직하게 다 내어놓고 다시 시작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참으로 숨길 것이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속일 수 있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그 한계를 무시하라고 속삭입니다. 요즘 우리는 어떤 마약 거래상의 고백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검거되어 마음이 평안하다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빨리 자유롭게 하지 못한 경찰이나 검찰이 그에게 송구해야 한다고까지 느껴졌습니다. 이들의 역할이 빠른 검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수할 능력이 없는 자를 자수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꼭 용광로 불같은 성령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님입니다. 추운 한파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촛불 같은 작은 온기 같은 모습을 가진 성령의 역사함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다니엘의 새 친구가 경험한 용광로처럼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신비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도피자로서 추노의 쫓김을 당할 때 앞에 쌓인 짚더미처럼 피난처에 안김 같은 느낌도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우리가 찾고, 두드리지 않으므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하신 여호와를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는 특권을 이미 허락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 특권을 가장 먼저 포기한 자가 야곱의 쌍둥이 형이 에서라고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도 에서의 후손 같음이 있음입니다.

아침에 디도서 2장을 묵상하는데 노인의 첫째 덕목이 절제라는 구절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노인의 특징 가운데에 조급함이라는 것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이라고 그 이유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래 살아왔다고 항상 너그러울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랜 친구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과연 이 땅에서의 오랜 친구가 영생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이 땅 우리의 소명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친구가 저세상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면 이 땅에서의 교제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영원히 함께할 친구가 우리 곁에 있습니까. 그런 친구가 있음이 예수이름공동체의 덕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사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이 친구가 영혼까지 친구가 되게 함이 우리의 소명임이 날마다 말씀 가운데서 외쳐지고 있는 것 같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 네 발을 디디고 살지만, 세상에 동화될 수 없는 성도임이 현실의 어려움을 기쁨으로 승화되게 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집니다. 성령의 열매 중 희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석하고 싶어지십니까. 세상에서의 희락입니까. 천상에서의 희락입니까.


세상의 희락은 재미 같은 것이고 천상에서의 희락은 기쁘고 즐거움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시던 어느 목회자의 강단에서의 외침이 떠오릅니다. 돈, 명예, 쾌락이 주는 희락은 이 땅에서만 가치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섬김, 헌신, 나눔, 함께함만이 기쁨이고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천상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누릴 기회가 성도에게는 허락돼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선물처럼 허락된 수많은 우리의 교재에서 우리가 노련한 성도들로서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도록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실천하는 또 하루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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