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 비판 모델(물레)

전문가 칼럼

[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 비판 모델(물레)

지난주 칼럼(821호)에서 본 바,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은 “생산력 개선은 모두 노동력에서 온다" 하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이야기와 함께,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여러 용어, 즉 자본, 가변자본, 불변자본, (노동량에 따른) 가치, 잉여가치 등의 의미도 아래 링크에 있다.


칼럼 821호: https://blog.naver.com/samahncpa/223190022680

계산의 틀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면, 모든 발명은 결국 노동의 소산이다. 그러나, 계산의 틀을 사용하면 막연한 “노동”이 아니라 “누구의” 노동인지가 중요해진다. 만일 타인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레를 자본가가 구입해 온다면, 그 자본가의 생산 과정에서 그 물레는 불변자본에 속한다. 


불변자본의 변경으로 인한 능률 향상은 그 공장의 노동자가 이룬 것이 아니다. 물레의 값을 1천 불이라 가정하고 물레의 수명을 “실 1백만 미터 생산”이라 가정하여 아래의 표를 만들어 본다. 가로줄 번호는 지난주 칼럼의 표와 비교하기 쉽게 붙여 두었다. (두 표의 비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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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칼럼(821호)에 제시된 표의 가로줄 f의 자리에는 “잉여가치”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만이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위 표에서의 능률은 모두 물레, 즉 불변자본의 채택으로 인하여 추가된 가치이므로 노동과는 상관이 없다. 


노동과 상관없는 가치 증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잉여가치 개념과 다르므로, 명확한 구분을 위해 여기서는 “물레 채택의 이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 분석을 위해 판매가격이라는 개념은 필요하지 않았다. 판매가격이 없기 때문에 가로줄 f는 그 누구의 “이익”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방추(스핀들) 대신 물레를 사용하는 데서 생기는 “이득”이다.


바닥줄의 실 1미터당 가변자본은 방추만 사용하면 1.60, 물레를 사용하면 0.08. 이러한 개선은 자본가가 불변자본을 잘 선택한 데 있으므로, 여기까지 계산 과정에서는“착취”라는 개념이 끼어들 틈은 없다. (자본가가 어떠한 불변자본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가변자본이 이처럼 변하는 현상을 마르크스가 설명한 적은 없다) 여기까지가 “8시간 작업 A”의 계산설명이다.


표의 오른쪽 반 “8시간 작업 B”는 문명의 고도화를 감안하여 물레를 사용한 생산을 그 시대 그 사회의 “표준”으로 본 계산치다. 그렇게 되면, 물레를 사용하는 경우에 비하여 방추를 사용하는 자본가는 152불만큼의 “손해”를 보게 된다. 여기서도 판매가격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손해”는 장부상 적자(손실)가 아니라 물레를 사용하는 경우와 비교하는, 앞에 설명한 “이득”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기술의 발달이 단위당 가변자본을 변동시킨다”라는 사실을 (계산 체계 없이 말만 가지고) 알고 있었다. 만일 마르크스가 위의 표를 본다면, 그는 “저러한 경우에는 물레를 사용한 계산치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스핀들을 채택하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모든 실 생산자는 물레를 채택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분석표의 모습은 지난주의 표로 돌아가고, 그 표의 ‘방추’ 자리에 ‘물레’가 들어가서 똑같은 착취구조를 보여주게 된다.


문제는 마르크스 시대에 가장 발달한 생산수단은 물레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칼럼 820호에서 본 바, 물레 위에 스피닝 제니, 그 위에 스피닝 뮬, 그 위에 증기엔진이 붙은 스피닝 뮬이 있었다. 저 표의 방추 자리에 물레를 놓고 물레 자리에 스피닝 제니를 놓아 비교하면 다시 이 칼럼의 표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또 마르크스는 “이번에는 스피닝 제니를 사용하는 경우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준이 자꾸만 올라가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숫자로 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계산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앞 문단의 ‘숫자로 표시할 수 없다”라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저러한 기술 진보에서 “과잉생산의 문제”를 발견했다. 그 과잉생산에 관하여서는, 칼럼 671호(과잉생산과 사치 1)부터 11개의 칼럼에 자세히 해설되어 위 링크의 블로그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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