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해 아래 남아있는 시간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해 아래 남아있는 시간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잠시이고 부질없는 생각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해 아래 인생은 그 누구도 그것을 궁금해할 자격조차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시간을 정하지 못했던 것처럼입니다. 우리는 그저 날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살아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위명령(The Greatest Commission)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심입니까. 우리는 때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노함, 미워함, 시기함, 경멸함은 아닐 것이리라는 데는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함의 반대어는 무엇입니까.

미워함의 반대어는 무엇입니까.

시기함의 반대어는 무엇입니까.

경멸함의 반대어는 무엇입니까.


4가지가 아니라 오직 한가지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보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분명한 곳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공의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공의는 사랑은 반대어입니까. 물론 해 아래 사는 우리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자성을 지니시고 해 위에 거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시고 의로우시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의어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노를 모르는 인생들에는 참으로 난제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분노하지 않는 삶에 대한 분노가 자주 표현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빚진 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자의 당연한 삶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바울서신의 주제어는 “주님 안에서”라고 주장하고 싶음입니다.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라고 하는 대명제를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하지 않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분노의 과학은 분노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불공정을 감지하면 우리 두뇌에서 공감과 혐오 등의 감정을 관할하는 뇌선엽(INSUIA)이 활성화되고 감정을 처리하는 영역인 편도체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불공정의 기준은 각자에게 다를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운전하다 보면 갑자기 끼어드는 경우가 가끔 있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차선에서 서행하는 차가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갑갑해집니까. 그러나 그 차를 운전하는 분이 백발이 성성함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어떡해집니까. 


때로는 차 뒤편에 붙은 BABY ON BOARD라는 SIGN이 우리를 누그러지게 함을 체험할 때 우리 속에 분노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체험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된다면 분노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분노의 지속 가능 시간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분노의 지속 시간은 15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15초를 참지 못하여 살인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옛적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참을 인' 자 3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입니다. '참을 인(忍)' 자는 마음 심(心) 위에 칼날 인(刃)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참 쉽게 하신 것 같지만 너무나도 과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 15초를 '참을 인' 자 3개로 표현함이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렇게 지혜롭게만 살 수 없는 것이 해 아래 사는 우리네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중 4번째로 열거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3번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화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음입니다.

공자께서도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것이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百行之本 忍之上(일백 백, 다닐 행, 갈 지, 근본 본, 참을 인, 갈 지, 위할 위, 위 상) 제자 자장이 몸을 닦는 말 한마디를 구하였을 때 그 답으로 한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면 분노조절 장애의 근본은 무엇이라 여겨집니까. 물에 비친 소나무를 보았습니다. 정작 소나무는 장승처럼 흔들리지 않는데 물에 비친 그 나무는 물결 따라 춤을 추고 있음입니다. 어떤 이는 나무의 물에 비친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여길 수도 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그다지 크고 광대한 까닭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음입니다. 그 15초를 넘기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분노조절장애라고 여겨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노는 성도에게 거룩한 장애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는 거룩한 분노에만 자유함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받아들임은 예수님께서 대속하신 그 십자가의 보혈을 부인하게 되는 지름길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공의이시다고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공의이시다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물에 비친 한 편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경건에 대해 분노하지 못함은 어리석음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어리석음이라고 정의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서 비롯됨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지상명령(THE GREATEST COMANDMENT) 충실한 나날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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