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나칼럼] “당신도 그대로 받기를 바랄게!”

전문가 칼럼

[레지나칼럼] “당신도 그대로 받기를 바랄게!”

50년간 편하게 가까이 지내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이분이 돌아가신 다음 날 급하게 엘에이로 오게 되었다. 이분은 30여 년 전 나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셔서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주셨는데 한국에서 신학대학을 나오시고 교회의 전도사님으로 근무 중 함께 살던 젊은 아들 내외와의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시며 내가 가끔 전화를 드리면 “나 좀 미국에 데려가 줘? 


삶이 너무 불편해!”라고 하시면서 반쯤 진심으로 또는 농담으로 얘기를 하시고는 했는데 마침 그때 내가 공부를 하게 되어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실 분이 필요하든 때라 한국에 계시던 친구 어머니인 이분에게 전화를 드렸었다.

“어머님, 미국에 오시고 싶으신 것 아직도 유효기간인가요?”


어머님께서는 “물론이지!”라고 답하시며 아들이 결혼해서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에서 신혼인 아들 부부와 함께 사는 게 무척 불편하시다며 어머님이 잠깐 미국이라도 미국에 가 있으면 아들 내외도 어머님도 조금 숨통이 트이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1990년도에는 미국 여행 오는 비자 내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었다. 어머님이 미국에 오시겠다고 하신 후 몇 달 만에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어머님은 그날부터 우리 아이들을 돌봐 주시고 나는 한 달에 어머님께 $600불을 주는 조건으로 아이들을 맡기며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어머님은 참으로 유쾌한 분이셨다. 

‘우리는 꽃이다, 노래하는 꽃이란다, 이 마을, 이 땅에 꽃이 가득 찼구나, 빨간 꽃도 피고 파란 꽃도 피고 우리는 꽃이다, 노래하는 꽃이란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한국 동요나 주일학교 찬송가 그리고 율동도 가르쳐주시고 때로는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라는 게임도 함께 해주시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도 가르쳐주시고는 했으며 내가 학교에 낼 과제 때문에 정신 차리지 못하게 바쁠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기도 하셨었다.


어머님은 특별하게 재치가 있으신 분이셨다. 어느 날은 어머님이 나를 살짝 부르시더니 놀라게 해준다며 “자! 이거 어때”라면서 보여주시는 곳은 장판으로 깔아놓은 마루 한 귀퉁이가 어머님이 실수로 뜨거운 촛불로 녹여놓으시고는 그 자리를 감쪽같이 크레용으로 덧칠해 놓으셨는데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아니, 어쩌면 낡은 장판 색보다 더 멋지게 색을 칠해놓으셨었다.

어머님은 부평의 최대 부자이셨던 000 님의 5 형제자매 중 맏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라시며 사랑을 듬뿍 받으셨던 분인데 남편이 어머님이 42세 이실 때 심장 마비로 돌아가시고는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시던 분이셨다.


물론 친정집이 넉넉하셔서 친정집에서 마련해주신 그때 당시에 여관(방 45개를 운영하시면서 별 어려움 없이 아이들을 키우셨었는데 어머님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고 사업을 벌이다가 부도가 나게 되고 어머님의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면서 자식 간에 재산 문제로 갈등을 빚으시고는 어머님께는 작은 아파트 한 채만 남으셔서 그 작은 아파트 한 채에서 아들을 결혼시키고는 함께 사는 것이 답답하다며 나에게 자주 전화를 주시고는 했었다.


친구는 함께 교회를 다니던 친구였는데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의 집을 왕래하면서 지내던 중 친절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친구 어머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해 주셔서 친구인 딸이 부러워할 정도였었다. 내가 미국에 오자 정민이는 어쩌면 그렇게 멀리 가버렸나! 라면서 아쉬워하시기도 했었다.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오셔서는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없는 맛있는 요리도 해먹이시고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요술을 부리셔서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으로 만들어주셔서 우리 아이들은 할머님을 엄청나게 따르기도 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50여 년간을 알고 지내던 그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우선 그분의 남은 가족들이 언어 문제로 장례 일정을 상의해야 하는 과정에 영어가 편한 내가 가서 도움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신 분에게 손자와 손녀들이 있지만 모두 먼 다른 주에서 살고 있고 아직은 손자와 손녀들이 어린 나이들이니 아무래도 인생 경험이 있는 내가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 이분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는 비행기표를 급하게 찾아내어 엘에이로 오게 되었었다. 


이분의 자녀인 두 딸은 생활이 어려워 여러 가지 일들로 고생을 많이 하게 되어서 영어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언어가 편한 내가 빨리 가서 도움을 드려야 할 듯 해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큰딸한테서 듣고 급하게 비행기표를 구해서 엘에이에 왔었다.

장례 예배 때에는 가족들과 함께 나도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대목에서 나는 내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다. 


내가 가끔 캘리포니아 쪽으로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어머님 댁에서 머무르며 이분이 좋아하시던 이북 요리들을 연구해서 해드리고는 했었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해드린 이북 요리 소고기 호박국 요리를 상을 받으시고는 얼마나 기뻐하시면서 즐거워하시는지 그때 내가 동영상을 촬영했었는데 그 사진이 어머님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정말 많이 슬펐다. 더욱 슬픈 내용 중 하나는 이분이 좀 더 사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내가 더 마음이 아픈 것이다. 거의 15년 전 어머님의 무릎이 안 좋으셔서 바깥출입이 어려워지자, 나는 강력하게 무릎 수술을 하시기를 권하였고 그 따님들도 어머님이 무릎 수술을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어머님이 무릎 수술 후에 간병인을 둘 수가 있으셨는데 어머님은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시다가 아무래도 어머님의 딸들이 자기를 간병해 주면 좋을듯싶다고 나에게 상의 전화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단호히 따님들이 살기에 어려워 풀타임으로 식당에서 일하시고 또 남의 가게에서 일하시면서 어머님을 돌보는 것은 말이 안 되니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님을 돌봐드리는 것은 괜찮을 것 같다는 나의 의견에 100퍼센트 찬성하시면서 두 따님에게 당신의 케어기버 일을 부탁하시게 되면서 어머님과 따님들 간에 마음이 상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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