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이신론{理神論, Deism}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이신론{理神論, Deism}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의 추구하는 것은 누구의 행복입니까.


헨리 나우엔이 Daybreak에 섬기러 갔을 때의 일화입니다.

이 유명하고 유능한, 그리고 지성을 갖춘 선생을 그곳에서는 아무도 몰라보았고 인정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것과는 무관한 지체장애인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사랑으로 섬겨줌만이 인정되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체장애인들이야말로 가장 순결한 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기독공동체는 과연 얼마나 순전한 곳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공동체에 있는 무신론은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깁니다.

물론 기독교와 무신론은 무관한 듯이 여겨지지만, 실제도 그러한지는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분열되고 갈등하는 원인 가운데 물질이 그 중심에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땅에 발을 대고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이 우리를 지배함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배고픔을 무시할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물질관의 정체성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오병이어의 이적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습니까.

물질을 주장하시는 분은 분명히 험하게 출렁이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우리 일반성도 중에 이것을 믿지 못하는 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활동에 대해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리는 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도 새로운 이방지역을 선교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스스로 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비량 선교라고 쉽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시작하면서 그것을 제일 먼저 실행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방을 성도 되게 함에 있어 물질의 힘이 가지는 막중함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물질만큼 그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먼저 간파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바울더러 자비량선교하라고 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제 만족을 느낍니까.

우리 속담에 배부르고 등 따시면 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북녘에서 가장 성행하고 있는 것이 뇌물이라고 하는 말을 탈북자들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그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무시되는 곳에서도 뇌물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공동체를 포함한 어느 곳에서나 물질은 여전히 그 막강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음이 그렇다면

말씀은 오직 외쳐지는 강단에서만의 소리입니까.


과연 유신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유신론은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중에 인격적으로 계시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을 하나님이라 칭하고 경배하는 대상을 유일하신 분으로 믿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신론 가운데 유사 유신론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이신론(理神論, deism)입니다.

흔히 우리에게 자연신론(自然神論, deis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신론자들은 창조주는 인정하지만 계시, 기적, 은총, 신비 등 이른바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신론에 의하면 우주, 즉 세계는 일단 창조된 다음에는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며 자기 전개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종교에서 기적 등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오직 이성적인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만이라는 한정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기독공동체 내에 자연신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활발한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은연중 우리 가운데 자리 잡은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원수와 이웃은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은 말씀이고 삶은 삶이라고 구별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말씀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행하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만 사랑하자는 주의가 아닙니까.


강단에서 외쳐지는 대부분의 말씀이 뜬구름처럼 대접받는 오늘날이지 않습니까.

설교자 자체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전제로 외쳐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 사도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하였는데 과연 바른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확신하고 외쳐도 지금은 온전히 경험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감동이 내일의 그것과 동일할 것이라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감동은 오늘 나에게 족한 것일 것이지 때문입니다.

강단에서는 물질보다 하나님 우선주의로, 신본주의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물질 만능은 아닐지라도 다분히 물질 우선주의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직 투표를 하는 것도 임직 예식을 하는 것도 헌금을 가장한 돈이 헌납됨을 당연시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안수집사의 조건을 신실함과 성령 충만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확증할 방법조차 시험 듦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교단의 총회장 선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세상으로부터 걱정의 소리를 듣는 형편이 오늘날의 우리 사정인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어느 세속 정당의 부패를 나무랄 자격이 있는 공동체입니까.

교회도 불쌍하지만, 세상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사가 부당함을 그들은 어디에 신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함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신원할 수 있는데 세상은 어디에 할 것인가가 막연하지 않습니까.


몇 해 전에 작고하신 고 이어령 교수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는 <영성에서 지성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 울림이 많은 저서였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떠오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인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외침도 다시 들려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의 복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늘을 본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나그네와 행인의 삶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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