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우리에게 성도의 표적이 있습니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우리에게 성도의 표적이 있습니까.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성도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성도(聖徒)와 성자(聖人, Saint)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천주교에서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용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성자는 무슨 도사급이 되고 성도는 일반인이란 의미는 더욱 아닐 것입니다.


성자(Saint)는 구별된 삶을 모범적으로 산 자를 일컫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성도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자로서 그 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결국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음입니다.


소위 오늘날 우리 교계에 평신도라는 말이 성행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평신도의 상급과 성직자의 상급이 다르고,

평신도의 소명과 성직자의 소명이 다르다는 것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위명령(Great Commandment 마가복음 12:28-34)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된 모든 이에게임을 부정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강단에서 외쳐지는 말씀의 취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평신도가 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호칭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제자”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어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복된 것이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것이었습니까.


바울은 다섯 번이나 마흔에 하나감한 매를 맞으면서 어떤 신음을 하였습니까.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어떤 심정으로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까.


TENT MAKER이었던 바울의 손바닥의 굳은살과 굵어진 손 마디 마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의 많은 학식이 아니라 이 거칠어진 손의 복됨을 그는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처럼 살았습니까.

오늘의 소위 평신도들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까.


공자님의 제자들,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들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어림없는 말일 따름입니다.


제자인 우리에게는 오직 그를 본받아 살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넘어서는 삶이란 언어도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이 땅에까지 오심입니다.

그것은 심판주로 오심이 아니라 대속주{대속(代贖), 구속(救贖), 속량((贖良), Redemption)

로 이미 오셨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란 이미 우리에게는 과거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와 인내는 그 역사를 힘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사역과 운동을 할지라도 그 역사를 힘입지 아니한 것은 소리나는 꽹과리의 것일 따름입니다.


탈북자의 구출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미 탈옥자를 또다시 탈출시켜야 함은 그 탈옥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중국 땅에는 약 30만 명 이상의 탈북자들이 불안에 떨며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이 지닌 불안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수많은 새터민을 통하여 듣고 있지만 우리 육체의 고통으로 나누기에는 실로 힘듦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음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감동 있게 표현하여도 그것들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고통이 될 수는 없음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그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죄입니까.

죄가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 죄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는 자들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우리 고국에서의 여러 가지 재해를 보면서 우리 가운데 만연된 안전불감증이 심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매뉴얼이 없다고들 지적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재해라는 것이 심각할 따름입니다.


설사 훌륭한 매뉴얼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들 지켜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될 따름입니다.


올해의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도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에 대비하는 자들인지를 짚어보게 됩니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칠흑 같은 바다 한가운데서 찬란한 불을 대낮같이 밝힙니다.

그러면 오징어가 떼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그 집어등의 빛은 살리는 빛이 아니라 죽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모이는 우매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생애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빠짐없이 하나님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필립 얀시]란 분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으로 인기 작가가 되었습니다.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처음에는 은혜이면 은혜이지 왜 이렇게 과장된 표현을 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의 목표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뇌일수록 거부할 수 없는 언어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


로마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KRV]


그러면 구원 얻은 자의 표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얼마간의 빚을 탕감받은 자입니까.

그렇다면 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그 기쁨은 잠시 잠깐 것이 되고 말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성품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칭의 된 자의 것이고 그 칭의의 효력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분명히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로 바른 정의를 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이 맡겨진 상태라고 정의하고 싶어짐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표적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여겨집니까.

우리는 그 표적을 이룰 수 있는 자입니까.


자기 부인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이룰 수 없는 엄청난 단어가 있지만 그것이 순히 벽에 걸려있는 표어같이 들리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우리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형상을 조금이라도 이루는 날 되길 기원합니다.

0 Comments
제목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