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칼럼] 한국 무료선교관에서 (1)

전문가 칼럼

[나은혜칼럼] 한국 무료선교관에서 (1)

인천공항에서 3시경에 비행기에서 내려 나오면서 화장실에 들러 그동안 칫솔질을 하지 못해서 너무 텁텁했던 이를 꼼꼼히 닦고 나오니 남편이 없어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나 혼자 남편을 찾다가 공항 밖으로 나갔나보다고 나오니 아무리 찾아도 없다. 미국 카카오톡 전화도 안 되고 한참을 찾다가 안내 데스크에 가서 남편을 찾는다는 방송을 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많은 짐을 카트에 싣고 오는 것을 만나다. 


화장실에서 너무 안 나와서 먼저 갔나 보다라고 자기 혼자서 짐을 다 찾고 나를 찾아 헤맸다고 한다. 나는 화가 나서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한다.

나도 절제하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 화가 난다. 올 4월에 남편의 동창생들과 여행을 했는데 화장실 간 아내를 기다리지 못하고 남편이 혼자서 급행열차를 타고 아내는 그다음 다른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탄 사건이 생각난다. 


저들이 전화로 서로 연결하면서 힘들게 만났고 동창생들을 웃기고 교훈을 주었는데 우리가 그 꼴이 되었다. 시간을 한참 허비하고 공항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서 어떤 청년이 택시도 잡아 주고 많은 무거운 짐을 택시에 다 실어주어서 너무 감사했다. 한국의 청년들이 외국인들에게, 여행객들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훌륭하다는 동영상을 남편은 너무 좋아하고 한국 청년들을 칭찬하는데 이런 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요금이 4800원이 나왔는데 기사님이 무거운 짐을 다 내려주고 친절하여 만 원을 드리다.

이 무료선교관은 은퇴 목사님의 사택이었는데 은퇴하시고 이사 가시고 그 빌라를 선교관으로 내놓고 선교사님들이 무료로 숙박하게 하는 곳을 우리가 후원하는 러시아 선교사님이 알고 우리에게 소개해서 이번에 한 달 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3층 빌라로 3층에 넓은 방이 3개이고 권사님과 집사님이 관리인으로 수고하시고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셨고 김치, 고추장, 된장 등 밥솥까지 모든 살림 도구도 다 준비되어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3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남편이 무거운 짐을 다 들고 올라가고 짐을 많이 가지고 온 벌을 받았다. 11월 17일까지 있어야 해서 추울까 보아 두꺼운 겨울옷을 가지고 오기도 했고 캄보디아 집회에 일주일 동안 갈 때는 여름옷을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짐을 참 많이 가지고 온 것이 후회가 된다.


이번에 온 목적은 1970년에 세운 “온 세계에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라는 천문교회의 표어로 “천문선교회”를 정부에 등록하려고 온 것이다. 미국에서 계속 달러를 개인 통장으로 보내면 의심을 받게 될 수 있어서 선교회를 정부에 등록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부터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행정사가 요구하는 인감도장을 찍어줄 회장이 없고 꼭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전에 건축을 위해 큰돈을 후원했던 목사님이 본인은 하려고 하는데 사모님이 결사반대하셔서 못하게 되고 난관에 부딪혀서 한국 여행이 너무 고민으로 힘들었다. 잠 못 이루고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편한 마음을 먹으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고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었고 자연히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자 안타깝게 저들을 이해하려고 기도했다. 


그리고 낙심하고 이 선교회가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라고 맡기면서도 불안한 것을 어쩔 수가 없었는데 남편은 조금도 고민이 없이 잠을 잘 자는 것이 너무 밉다.

그리고 내가 인감도장이 있어서 그것으로 해보자고 하다. 7년 전에 은퇴하고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려고 작은 빌라를 샀다가 딸이 오라고 간청해서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사고팔 때 남편이 내 이름으로 해서 인감도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아무 재산이 없는데 인감도장이 무슨 소용이 있나 했다. 우리는 이중국적자로 우리 이름을 시누이 집에 올려놓고 있다. 그 집을 판 돈은 개척교회에 헌금했고 칼로스의 기초 미션 펀드가 되었고 ‘칼로스’는 ‘선한 목자’의 ‘선한’이고, 옥합을 깨트리는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저가 내 장사(葬事)를 예비한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신 그 ‘좋은’이다.


남편이 임플란트를 하려고 믿음이 좋은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치과를 소개받아서 가다가 30분 일찍 가게 되었는데 그 치과 앞에 동사무소가 있어서 들어가서 내 인감도장을 주고 인감증명서를 떼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내가 선교회를 4년 전에 미국에서 만들었고 내가 시작했으니 다른 사람들을 회장으로 세우지 말고 나더러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 사업으로 이 선교회의 후원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애쓰고 있는데 내가 하는 것이 제일 적합할 것이 아닌가?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다 찍고 남편이 임플란트를 이번에 다 할 수는 없다고 해서 또 너무 실망이 된다. 아무리 싸게 해주셔도 미국에 갔다가 다시 나온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나도 계획에 없었지만, 치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스케일링을 하고 파인 이를 때웠다. 


남편은 캄보디아 집회에 다녀온 후에 시작하기로 하다. 치료비가 보험도 되어서인지 너무 적게 나와서 감사를 드리고 선교관으로 오면서 점심으로 6500원짜리 뷔페에 들어갔는데 사람들도 많고 반찬도 많고 실컷 먹어도 되고 맛있었다. 마켓에 가서 물, 사과, 고구마, 냅킨 등 5만 원어치를 사니 배달을 해주어서 감사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명필로 남은 서류들을 작성하라고 하니 나보고 하라고 하고 피곤하다고 잠을 잔다. 내 일이니 내가 꼼꼼히 회원명부와 사업계획 등을 다 작성하고 남편에게 읽어보라고 하니 알아서 하라고 읽지도 않는다. 내가 미국에서부터 고민도, 기도도 많이 했고 이제는 내 힘을 다 빼고 주님의 뜻에 맡기고 평안을 찾기로 하다. 너무 피곤해서 정신없이 자다가 남편이 깨워서 빵 조각을 조금 뜯고 이 선교관을 운영하는 교회의 수요 저녁 예배에 가다.


수요일에 사람들이 많이 나오셨고 젊은 목사님이 설교를 힘차고 은혜롭게 잘하신다. 내 딸도 목사님이고 내 사랑하는 장손 외손자는 사립초등학교에서 월반했던 영재였고 아빠처럼 의사가 되겠다고 했었는데 은혜받고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가서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다. 내 동생은 그 말을 듣고 너무 아깝다고 의사가 된 후에 가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본인은 결심을 굳힌 것 같다. 


목회자의 길은 가난하고 좁고 험한 길이지만 주님께 더욱 가깝게 가고 주님께 헌신하는 길이니 저의 일생이 사명으로 더욱 복되기를 기도한다. 교회 주일예배에는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아버지와 같이 드럼을 치고 금요 철야 예배에는 목사님의 설교 후에 청년들과 같이 찬양하고 기도회를 은혜롭게 인도한다. 온 가족이 모든 예배에 일찍 가서 기도로 준비하고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이 주님께서도 너무 예쁘게 보시고 사랑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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