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제목: 초미(焦眉)의 관심사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제목: 초미(焦眉)의 관심사

초미란 눈썹에 불이 붙었다는 매우 급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초미의 한자는 각각 그을릴 焦 눈썹 眉를 씁니다.


이제 70여 평생을 산 나의 관심사는 무엇이겠습니까.

또, 갓 50이 된 우리 사위의 관심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 이웃의 관심사에 주목을 할 여유로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 대화를 할 때면 종종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의 말이 도무지 공감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그런 사람을 향하여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선 엄청 다름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겠습니까.


짐작하건대 세계관일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관이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인구가 72억이라면 72억 개의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무리한 것입니까.


세계관은 누가 만드는 것입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의 세계관, 즉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성한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때의 세계관과 복음의 포교자로서 지녔던 세계관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가진 세계관이 내일과 같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세뇌된 세계관에 갇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뇌됨이란 마치 양파 껍질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 같기도 합니다.


세뇌됨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리의 맹세가 참으로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나서는 40명의 맹세함을 보게 됩니다.


저들은 한목소리로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만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도 한 명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드러내는 대목이 존재함을 보게 됩니다.

당시, 랍비에 의해 다음과 같은 4가지 경우는 명세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1) 선동에 의한 맹세

2) 과장된 맹세

3) 잘못된 맹세

4) 억압 때문에 이루어진 맹세라


이러한 4가지 경우의 허용됨이 아마도 쉽게 목숨 걸고 맹세하게 함이라고 여겨집니다.


목숨을 건다고 입술로 말할 따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메시아를 고대했지만 자신의 정의에 맞는 메시아만을 요구하였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여기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이 땅에 거하는 이들의 뜻이 하늘과 땅 차이를 보여 줌을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후래사까지를 보시지만 이들은 이 땅에서의 편안함을 구하는 근시안적인 안목을 벌벗어 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라고 표현되는 이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날(길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의해 훈련되지 않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관심은 당면 과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저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탈북한 유튜브 방송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노후를 염려하지만, 북녘에서는 다음 끼니를 걱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북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드러냄이라 여겨집니다.


어떻게 보면 끼니가 해결되면 또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도의 초미의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성도에게도 당장의 끼니가 걱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음입니다.


우리 최대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다고 현실이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스겔 27장에서는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소서 하는 잠언 30장 8에서의 아굴의 기도를 다시 기록하고 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이어지려면 끼니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베풀기를 의무로 장려하는 까닭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도 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식-의-주는 이방인의 염려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의 초미의 관심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6장 25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듣기를 원합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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