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정처 없는 인생>

걸어온 길은 되돌아볼 수 있지만 앞으로 걸어야 하는 길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누구나 쉽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걸어온 길이 험악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으로 추정되는 전도서의 기자인 코헬렛도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하며 해 아래의 인생길을 평가합니다.


인생은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수고로움이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도 우리에게는 별로 반박할 것을 찾을 수 없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스스로 운명론자로 자처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결국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하여 정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명론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예정론자는 그 길을 애쓰며 달려가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마라톤 경기에서 1등 한 자가 월계관을 받지만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자도 그에 못지않은 찬사를 받음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게 됨입니다.

1등을 한 자에게도, 마지막에 들어온 자에게도 같은 목표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성에서는 모두에게 동일한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천성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비교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길고 짧음, 높고 낮음이 비교될 필요가 없는 곳이라 여겨짐입니다.


그러나 운명론자는 중도 포기하며, 그것이 운명이라고 하며 목표 지점을 스스로 변경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포기한 삶이 얻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사함이겠습니까.

평안이겠습니까.

원망이겠습니까.


인생들끼리 화목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3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울 선생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얘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화목의 비결이 <사랑 안에서>라고 역설하는 것 같음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또한, 사랑 안에서 행하는 내용을 그다음 절에 설명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4절 말씀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그렇습니다. 화목의 비결은 상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며, 오래 참음이란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문득 떠오르지 않습니까.

저는 아버지 하나님의 주특기가 <오래 참음>이라 여겨집니다.

초대교회 당시 많은 성도는 그들의 당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흔적이 상당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당대에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아닌 심판주로 오셨다면 누가 <남은 자>일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계시록의 그 144,000명을 기다려 주심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의 화목의 제물로 예수님을이 땅에까지 보내어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미련하고 우매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장(battleground)에서 위장막으로 생명을 보호하려 시도해 보지만 그렇게 실효가 크지 않음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함이 그러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거짓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림을 시작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회한의 눈물이 흐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나름의 치례함으로 위장해 보지만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사탄의 세력들이 우리를 그 속에 더 밀어 넣으려 함을 우리 일상이 체험하고 있음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원합니까.

아니 더 쉽게 말하면 쉽고 평탄한 넓은 길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드리는 거의 모든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늘 형통을 원하는 이기적 신앙인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선견자 중 그 누구도 평탄한 길을 걸어온 자는 찾을 수 없음이 또한 우리 신앙함의 아이러니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유년기에는 주로 강단에서 설교되어지는 것이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러한 외침이 구태의연하게 들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이미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삶과 관계없이 천국행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모든 이에게는 너무나 확실히 정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정처 없는 인생>이 아니라 <정처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 땅 우리의 삶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향은 고향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본향은 반드시 가야만 할 곳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고향은 태어난 곳이란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본향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감사>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이 신앙인인 것처럼 사는 것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신앙인의 덕목을

첫째는 겸손, 둘째도 겸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왜이겠습니까.

그 진정한 까닭이 구속에 대한 감사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 겸손, 겸손>의 다른 표현은 <감사, 감사, 감사>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 같이 여겨지지 않습니까. <감사>가 성도의 일상적 용어라고 주장하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대속의 주>를 힘입어 <정처 있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일상이 감사의 조건을 애써 구하는 날, 그리하여 허락하시는 그 기쁨에 흠뻑 젖는 날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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