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잊지 못할 스승님-김동길 교수님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잊지 못할 스승님-김동길 교수님

우리나라 대학 역사상 한 과목에 200~300여 명이나 수강 신청을 한 예는 없을 것이다. 김동길 교수님의 서양문화사 시간에 연세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대강당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가 5공화국 때 무슨 사건으로 김 교수님이 두 번째인가 옥고를 치르고 나오셔서 다시 강단에 서기 시작하실 때였다.


원래 김 교수님은 우리들이 다닐 때는 정법대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고, 문과대학에서는 별로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서양문화사와 미국 역사를 가르치셨다. 에이브러햄 링컨 연구로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개인적으로 링컨을 존경하는 분이며,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주로 우리들 교복과 흡사한 옷을 입고 다니셨다. 


늘씬하게 큰 키에 반곱슬머리를 멋있게 뒤로 갈라 넘긴 모습이 늠름하고도 믿음직스러웠다.

늘 학생들 편에서 우리들의 의견을 들어주셨고, 자유와 그리고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는 일에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늘 말씀하신 분이었다. 그런 실증을 우리는 4·19 때 목격했다.


김 교수님은 4.19 당시 백낙준 박사(당시 연세대 총장)에게 책임지고 4천여 명의 연대생들을 거느리고 평화적인 데모에 참가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면서 무사히 다녀오겠노라고 하셨다. 백 박사도 김 교수님의 의도를 만류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들의 의거를 찬양해 주셨다.


백양로를 지나 단숨에 우리들은 신촌 로터리로 나왔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서대문경찰서 순경들과 마주쳤다. 이때 김 교수님은 말 탄 기마 순경에게 다가서서 말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신네 경찰관 중에서 제일 높은 책임자와 만나고 싶으니 나를 그 사람에게 안내하시오"라고 했다. 


기마 경찰관은 어깨에 무궁화 금배지가 4개나 붙은 경찰서장(?)에게 김 교수님을 데리고 갔다. 나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총무 일을 보던 때라 데모대의 맨 앞에서 주먹을 내두르며 데모를 했었고 그때 처음으로 김 교수님을 옆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우리 연대생 4천 명을 책임지고 이끌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다시 학교로 데리고 갈 것이니 당신네들도 무력으로 막지 말고 길을 트시오." 금테 모자를 쓰고 어깨에 무궁화 배지가 여러 개 붙은 높은 경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은 무사히 이화여대 앞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구름 떼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이화여 대학생들, 홍익대 학생들과 합류하면서 질서는 완전히 깨졌고, 경찰관들도 곤봉을 휘두르고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들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광화문 쪽으로 달렸고, 중앙청 앞 광장에서는 수만, 수십만의 대학생, 고등학생, 시민들과 어우러져 데모를 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최인규라는 사람은 경찰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와 모 사단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마침내 전국적으로 4·19의거는 불이 붙었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김 교수님도 머리에 부상을 입으셨고, 당시 의대생이었던 최정규라는 친구가 총탄에 맞아서 즉사했다. 


4·19 당시 대개의 교수들은 몸을 사렸고, 어느 곳에 있는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는데, 김동길 교수님만은 우리들의 뜻을 장하게 여겼고 몸소 앞장서서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하셨다.

이때부터 김 교수님은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사실 대학 시절에 나는 김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과도 다르고 또 선택과목으로 문화사를 택하지 않았으므로 기회가 없었고, 가끔 채플 시간에 그분의 강연을 들어 본 정도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어도 별로 김 교수님을 뵌 적이 없었다.


내가 김동길 교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겨울부터였다. 시애틀에서 살 때 우리 교포들이 김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싶어 하는데 아무도 그분을 초청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조용히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동문 한 사람이 내년 여름방학 때 김 교수님을 초청하여 이 지역에서 강연회를 열어 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김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 시애틀 지역에 오셔서 강연회 연사로 말씀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때부터 장소를 물색하고 모든 준비를 시작했는데, 부족한 내가 초청위원회 위원장으로 모든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후원에는 연세대 워싱턴주 동창회와 교회연합회가 공식적으로 신문에 이름을 내주었다.

시애틀에서 이틀, 오리건에서 하루, 그리고 워싱턴주 내의 명승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구경을 시켜드리면서 약 1주일간 교수님과 함께 지냈다. 그동안 아주 가까워졌고, 교수님이 나를 친아우처럼 대해 주셔서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이때 시애틀 교민들이 연이틀 동안 3천여 명이나 모여서 김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다. "기독교가 한국 역사에 기여한 공적"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으며 달변과 유머, 위트가 섞인 말솜씨로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시국강연회 비슷한 성격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 교수님을 그다음 해에도 모셨고, 해마다 미국에 오시면 으레 나를 찾아주셨다. 내가 어쩌다 한국에 나가면 반드시 교수님 댁에서 하루는 자야 하고, 맛있는 냉면을 꼭 먹었다. 내가 김동길 교수님을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두 번째인가 강연하러 시애틀에 오셨는데 한국에서 내 한복 한 벌을 사가지고 오셨다. 혼자 사시는 분이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시고 내 몸의 치수까지 어느 틈에 알아 놓으셔서 분홍색 보자기에 잘 개서 싸가지고 오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으면서 무척 감격했고, 무엇으로 그 사랑과 선물에 답해야 할지 몰랐다. 


해외에 살아도 한복을 입을 때가 있을 거라면서 주셨다. 지금도 그 옷을 일 년에 한 번 정도 입으면서 고이 간직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어렵고, 고민이 많았을 때 김 교수님은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고 오늘의 내 삶을 가져오게 하신 분이다. 


대개 인간들이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망하거나 넘어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심보를 가졌는데, 우리 김동길 교수님은 그럴 때 같이 가슴 아파하셨고,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해 주셨고, 심지어는 한국에 나와서 당분간 당신과 함께 한집에서 살자고까지 하셨다. 


더 자세한 내 개인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좌우간 나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시며, 잊지 못할 은사님이시다. 작년에 하나뿐인 누님인 김옥길 총장님을 잃고 실의에 빠지셨을 때 전화를 했다. "당장 지금은 눈에 볼 수가 없지만, 나중에 다 만나서 우리 모두 함께 살 것 아니냐' 하시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해외여행 때는 반드시 엽서를 띄우시며, 우리 식구 모두에게 안부를 전하시는 자상하신 교수님! 아직도 할 일이 많으신 교수님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니 그분의 건강도 지켜 주시리라 믿는다. 일 년에 강연을 평균 500여 회 정도 하시니 하루에 거의 두 번을 하시는 셈이고, 해외에는 해마다 두 번씩 나들이하시면서 어디를 가도 강연회나 설교를 하시는 분이다. 


강연을 가장 많이 하시는 분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며, 이미 요한 웨슬리보다도 더 많은 강연을 하신 분이기도 하다. 김 교수님이 즐겨 쓰시는 말을 몇 마디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숙한 인간이란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조리 있게 분석하며, 깊이 있게 생각하고, 확실하게 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 해야 한다."

김 교수님은 2022년 10월 5일에 거처를 하늘로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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