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아랫목의 추억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아랫목의 추억

우리말에 자리, 장소, 위치를 나타내는 '목'이란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목이 좋은 식당'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우리가 사는 방도 '목'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상석(上席)의 자리가 따로 엄격히 정해져 있다. 


이 상석이 바로 안방의 아랫목이다. 온돌이 깔린 방의 아궁이에서 가까운 ‘아랫목’, 아궁이에서 멀어서 바닥이 찬 ‘윗목’, 그리고 아랫목 중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부분인 '불목'이 있다. 윗목은 차다 못해 발이 시리지만 불 잘 드는 불목은 절절 끓는다. 


장판이 까맣게 타기도 하고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불목을 포함한 아랫목은 바로 제일 좋은 그 방의 명당자리이다.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위해 교육을 받을 때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첫째 한국 온돌방에 들어가 절대로 방 아랫목에 앉지 말고 위쪽에 앉으라고 한 점이다. 


아랫목은 상석이어서 주인이 앉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으면 건방지다고 야단을 맞는다. 둘째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김장을 하고 얼지 말라고 짚으로 의지간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그곳을 화장실로 잘못 알고 변을 보는 일이 있으니 이 점 주의 하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랫목은 사라진 지 오래고, 시골 화장실도 어디를 가나 비데(bidet)가 갖춰있고 깨끗함이 세계 1위라니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하겠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짓고 늦게 오시는 아버지 진지를 따로 따뜻하게 유지하셨다. 


진지를 뚜껑이 있는 식기에 담고 수건으로 싸서 방에 있는 불목의 이불속에 덮어 놓으셨다. 조금 덜 추운 날엔 아랫목 이불에 발 넣는 식구(食口)들이 없어서 아버지 진지는 온전한 모습으로 보관되었다가 아버지의 늦은 상차림에는 뽀얀 김이 모락모락 났었다.


그러나 조금 날씨가 추우면 아랫목 이불속으로 발 넣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밥이 있는 줄  모르고 누군가가 발로 툭툭 차서 밥그릇이 뒤집혀졌다. 이불 속에 넣은 발에 끈적끈적함이 느껴질 때면 밥, 식기, 식기 뚜껑이 따로따로 놀아 이불 밑에서 뒹굴었다.


얼른 이불을 뒤집어서 밥을 식기에 담고 뚜껑을 덮어 처음에 있던 장소에 두었다. 이때 쌀밥이면 작업이 쉬웠지만 보리밥이면 끈기가 없어 힘이 들었다. 그리고 이불 홑청의 끈적한 것을 없애기 위해 이불에 들러붙은 밥풀들을 뜯어 먹었다. 어머니한테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빨리하느라 급했다. 들키면 꾸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버지 진짓상을 보면 상에 오른 진지가 유난히 양이 적어 보였고 밥이 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추운 겨울날 학교에 갔다가 언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 내 손을 꼬옥 쥐고 끌어다가 요 밑에 묻으셨다. 그리고 따뜻한 어머니의 손으로 내 언 볼을 감싸주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얼마나 추웠니? 몸이 꽁꽁 얼었네." 하셨다. 


그때 느꼈던 어머니의 사랑을 영영 잊지 못한다. 그리고 따뜻한 어머니의 손이 닿는 순간 무척이나 행복(幸福)하였다. 날씨가 추울 때면 우리 육남매는 이불 밑에 발을 묻고 둥글게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깔깔대며 웃고 즐거워했다.


이불 밑에서 나는 냄새가 싫지 않았다. 엄마 젖 냄새 같기도 한 구수한 냄새였다. 이불을 들썩일 때마다 나는 독특한 냄새가 또 있었다. 바로 충청도 사투리로 '퉁퉁장' 냄새였다. 표준말로는 청국장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면 퉁퉁장을 좋아한다. 냄새가 나는 게 흠인데 영양분이 많아 한번 먹어보면 그 맛에 중독이 된다. 그 냄새가 옷에 배어있다가 솔솔 났다. 


간식거리가 귀한 때였기에 무엇이든지 먹고 싶었다. 우리들의 배가 출출할 때면 어머니는 안방 *통가리 속에 저장해 둔 고구마를 꺼내어 아궁이에서 구우셨다. 고구마는 섭씨 8도 이하이면 동해(凍害)를 입어 썩으므로 안방 귀퉁이에 통가리를 만들어 갈무리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뜨거운 군고구마를 꺼내 오시면 안방에 군고구마 냄새가 진동하였다. 군밤 냄새 같기도 한 구수한 냄새는 식욕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는 군고구마를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었다. 간간하고 얼음같이 찬 동치미 국물이었다. 밖의 땅속에 묻은 동치미 국물은 입안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땅속에서 숙성 발효한 동치미 국물맛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저녁 늦게 출출하면 눈 덮인 밭을 헤집고 쭉쭉 뻗은 무를 꺼내왔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껍질을 벗기고 한입 베어 먹는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란 겨울밤의 별미(別味)였다. 


아랫목은 어머니의 체온이 구심점(求心點)이 되어 발산하는 따뜻한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우리들은 한 이불을 덮고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며 품 안에서 스르르 잠이 들곤 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기에 동기간의 진한 정(情)을 나누며 한 몸이 되어 남다른 우애(友愛)를 다졌다. 그러나 쩔쩔 끓던 아랫목도 긴긴 겨울밤이 지나 새벽녘이면 추웠다.


아버지는 새벽 일찍 일어나 쇠죽을 끓이셨다. 안방이 추울까봐 차가운 새벽공기에 추운 줄도 모르시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안방은 다시 온기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 덕에 꿀맛 같은 새벽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아랫목에서 온몸을 지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피로가 말끔히 풀려 날아갈 듯 몸이 거뜬하였다.


아랫목은 모진 바깥 추운 날씨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정신적 안식처였다. 현대인들은 편리하고 좋은 주택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언 손과 언 볼을 녹여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과 이불 밑에 발을 넣어 몸을 녹이던 따뜻한 아랫목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형제들 사이에 불화(不和)와 반목(反目)이 잦은 것이 아닐까.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우리 육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가정을 이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의 체온을 나눠주던 아랫목은 마음속 깊이 추억(追憶)으로 남아있다.


*통가리: 쑥대나 싸리를 엮어 마당이나 방에 들러 치고 그 안에 감자나 곡식 등을 채워      쌓은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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