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칼럼] 나귀의 영광

전문가 칼럼

[나은혜칼럼] 나귀의 영광

성경 속에는 대표적인 세 마리의 나귀가 나온다.

민수기 22장의 유명하게 말하는 발람의 나귀가 나온다. 모압의 발락 왕이 이스라엘의 침공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발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자기 나라에 와서 예루살렘을 저주하라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세 번째까지 거절하였지만 물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허락하여서 가다가 좁은 골목에서 나귀가 벽에 발람의 다리를 부딪치고 다치게 하자 발람이 화를 내고 채찍으로 나귀를 때리자 나귀가 말을 한다.

“왜 나를 세 번이나 때리느냐? 내가 언제 불순종한 적이 있느냐?” “없다. 


그러나 내가 칼이 있었으면 너를 죽일 뻔하였느니라.” 그리고 발람의 눈이 열려 작은 골목에서 칼을 빼고 무섭게 서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게 되고 놀라서 “하나님께서 이 길을 원하지 않으면 안 가겠습니다” “가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너에게 하라는 말만 꼭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하고 발람은 모압 땅으로 가서 세 번씩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원한 발락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께서 하라는 축복의 말씀을 전하자 발락이 화를 내고 쫓아보낸다. 그런데 발람이 너무 미안해서인지 모압 여자들로 이스라엘 군사들을 유혹하여 음란죄를 짓게 하라는 꾀를 가르쳐주고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많은 군사들이 멸망을 당하게 만든다. 


발람의 나귀는 칼을 빼든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고 주인을 구원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째는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리자 사울에게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해서 사울과 사환이 나귀를 찾으려고 사흘이나 헤매고 다닌다. 도대체 그 암나귀를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곳까지 찾으러 갔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 물어보게 되고 사무엘은 전날에 사울이 찾아올 것을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셔서 그날에 기름을 붓게 되었다. 사울은 키가 크고 효자였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타고 가신 나귀 새끼다. 


사람들이 호산나 찬양을 하면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깔고 또 나귀가 걸어가는 길에도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를 대환영하였다. 어린이들까지도 돌을 던지고 조롱을 받던 초라한 나귀는 얼마나 신이 났을까? 예수님은 말이나 낙타나 코끼리나 소나 왜 그런 우람한 멋진 짐승을 타지 않으시고 초라한 나귀를 타셨을까? 


그것은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다는 구약(슥 9:9)에 예언된 것이었다.

그러면 나귀란 어떤 특징이 있는 짐승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귀가 크다. 나귀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짐승으로 당나라에서 가지고 왔다고 해서 당나귀라고 불렀는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라는 고사가 있는데 귀가 큰 특징이 있다. 눈, 귀, 콧구멍도 다 두 개인데 입은 하나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은 적게 하라고 하신다. 


사람들 모두 말을 많이 하고 실수를 한다. 우리가 말한 대로 주님께서 들으시고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으니 말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입은 먹는 일과 말하는 일을 하는데,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을 특히 조심해야 건강하고 의인이 되고 존경을 받는다. 예수님의 말씀 속의 짐승들은 모두 사람들의 비유이다. 


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이리는 세상의 사나운 사람들이고, 개나 돼지나 여우와 독사, 뱀들은 다 악인들을 지칭한다고 말씀하셨다. 개 같은 인간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소용이 없고 돼지는 진주를 주면 물어뜯고 헤롯은 여우라고 하셨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독사, 뱀이라고 하셨으니 오늘날 목사들이나 주의 종은 특별히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귀가 크다는 것은 많은 말을 듣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잘 들어야 한다. 또한 나귀 새끼의 가냘픈 체격은 우리 사람을 상징한다.


2. 고집이 세다. 사람들 모두 다 고집이 있다. 출애급기 13:13에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하라고 하시고 아니면 목을 꺾으라고 하셨다. 이어서 사람의 첫아들도 다 하나님의 것이니 반드시 어린양으로 대속하라고도 하셨다.


3. 나귀는 정욕도 아주 세다고 한다(겔 23:20).

4. 체력도 아주 강하다. 우리나라의 나귀는 원래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이기에 당나귀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기후에 잘 적응하여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의 이용도 목사님은 “나는 예수님을 등에 태운 한 마리의 나귀다.”라고 하셨다. 나귀란 초라한 놈이 자기를 대접하고 환영하는 줄 알고 교만하면 큰 오산이다. 예수님께서 내리시면 나는 초라한 어린이라도 돌을 던지고 조롱하는 초라한 한 마리의 나귀, 무거운 세상 짐을 잔뜩 싣고 가는 보잘것없는 나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셨는데 이 악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 마리의 초라한 나귀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라고 하셨다. 블레셋에서 송아지를 갓 해산한 암소 두 마리가 이스라엘 지경으로 하나님의 궤를 싣고 울면서 새끼에게 가지 않고 곧바로 벧세메스로 가서 싣고 간 수레는 장작이 되고 암소는 제물이 되어 바쳐졌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시고 우리를, 특히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다. 언약궤를 싣고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던 암소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싣고 천국을 향해서 가며 충성하다가 제물이 될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우리의 등에 짊어지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만민이 알고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소원하자.


마지막 때에 믿는 나라, 미국과 온 세계가 타락하여 전쟁과 음란과 전염병이 창궐하고 불 심판만 남았는데 탄식하며 이마에 인을 맞은 의인이 있으면 주님께서 그 땅을 지켜주신다. 우리 등에 우리의 대속제물인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한 마리의 나귀가 되자. 


나귀인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타시면, 함께 하시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그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제물로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천국의 생명을 주시며 마귀와의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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