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칼럼] 춘천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 -시애틀한인로컬문학칼럼

전문가 칼럼

[이성수 칼럼] 춘천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 -시애틀한인로컬문학칼럼

이성수


3박4일로 강원도 홍천을 여행하던 중 춘천에 있는 소설가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갔다. 대개 유명 가수나 문학인을 기념하기 위해 노래비나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을 보았지만 한 마을이 문학촌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또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차역 이름이 사람의 이름으로 된 것은 ‘김유정역(서울-춘천행 춘천 바로 전 기차역)’이 으뜸이다. 이외 ‘김유정 우체국’이 있고 ‘농협 김유정지점’이 있는 등 사람의 이름을 딴 ‘호칭’도 처음 보았다. 

춘천 시골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정 문학촌’은 입구부터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가득한 것을 보니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엄청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김유정 문학촌’이 무슨 매력이 있어 많은 관객을 유혹하고 있을까? 외관상으로 볼 때 한마을이 온통 문학 촌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고 주말이면 상설무대에서 상시 ‘아리랑공연’과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박양순의 유정의 사랑 공연’을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절을 보고 신도가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좋아 중생이 모인다는 말이 있다. 문학촌을 잘 꾸며 놓아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 보다 김유정 작가 본인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유산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김유정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문학촌 까지 건설하고 있을까? 얼른 듣기에 김유정은 여자 가수 이름 같기도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시인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김유정을 모르는 사람은 꽤 많다. 그것은 김유정이 윤동주보다 문학적인 가치가 떨어져서 그럴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유정은 1908년 태어나서 1937년 사망, 윤동주는 1917년 태어나서 1944년 사망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거의 비슷한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적인 작가들이다.

생각하건대 김유정이 윤동주 보다 덜 알려진 이유는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고 독립유공자였지만 김유정은 순수한 향토작가(鄕土作家)였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입장권을 구입하여 김유정의 생가와 기념관을 들려 김유정의 일생일대를 소상하게 드려다 보고 상시 해설자의 해설을 들었다. 

그의 생가는 중부지방에는 드믄 ㅁ자 형태로 기와집 골격에 초가집을 얹었다. 그 이유는 헐벗고 못 먹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라 집의 내부를 보이지 않게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생가의 대문간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아궁이가 있다. 이 아궁이에 불을 때면 사랑방 구들을 데우고 낮은 굴뚝으로 연기가 나간다. 밥을 짓던 부엌의 굴뚝은 생가 뒤란에 따로 있다. 뒤란의 굴뚝 역시 낮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을에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민초들을 배려함 이였다. 또한 굴뚝을 키가 작게 만들어 퍼진 연기는 해로운 병충을 퇴치하는 기능을 갖기도 했다. 

김유정 기념전시관 속으로 들어가면 김유정의 생애와 연인들, 그의 작품집들, 사진으로 보는 김유정문학촌의 어제와 오늘, 음반과 축음기 판소리, 일제 강점기에 나온 담배 희연(稀煙) ,그의 작품이 발표된 잡지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과 사진과 약력, 김유정의 마지막 편지 필승전에 눈길이 쏠렸다.

죽기 11일 전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친구에게 쓴 편지인데 내용은 이렇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요즘 울고 누워있다... 생략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이라 불러왔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동백꽃은 남쪽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인 붉은 동백꽃이 아닌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淸風).강원도 춘천 출신인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유정의 가문은 조선 팔도 100대 부자에 속할 만큼 어마어마한 갑부집안이었다. 김유정의 부친 대(代)에 해마다 3천석 내지 6천석의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춘천 실레마을이 본가인데 당시 서울에 99칸짜리 집을 짓고 살 정도로 대부자였다. 그러나 김유정은 막내여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 1929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김유정 자신은 중퇴이유를 배울 것이 없다고 하였지만 만날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해 퇴학 맞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김유정은 서울생활에서 예쁘고 학식이 있고 판소리 예술에 뛰어난 박록주란 처녀에게 빠져 30여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한 통의 답장을 받지 못하였어도 스토커처럼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실로 풍류적인 사나이이었다. 결국 사랑은 결혼으로 이뤄지지 못해 정신적으로 좌절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유복하던 집안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큰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주색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여 김유정은 이래저래 실의에 빠져 한때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1932년에는 고향 실레마을에 사설 학교(錦屛義塾)를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또 한 때는 금광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실패하고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 친구의 권유에 의해 서울에 올라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올랐다. 그 뒤 구인회(九人會)의 회원으로 김문집(金文輯)·이상(李箱)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김유정은 등단하던 해에 ‘금 따는 콩밭’·‘떡’·‘산골’·‘만무방’·‘봄 봄’ 등을 발표하였고, 그 이듬해에 ‘산골 나그네’·‘봄과 따라지’·‘동백꽃’, ‘땡볕’·‘따라지’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작가생활을 통해서 30편 내외의 단편과 1편의 미완성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길 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으나, 가난과 치질병, 결핵병으로 갖은 고생을 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요절(夭折)하였다.

시인 윤동주도 28세에 요절하였고, 소설가 이상(李箱)도 28세에, 가수 배호는 27세 미혼으로 요절하였다. 모두 아까운 천재들이다. 특히 배호의 장례식에는 소복 입은 젊디젊은 여자 펜들이 200m나 넘게 길게 줄서서 그의 안타가운 죽음을 애도했다는 후문도 있다 

‘김유정문학촌’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김유정은 32편 단편소설은 순수 한글로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명사, 동사 등은 한문으로, 조사와 조동사 등을 한글로 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한문을 쓰지 않는 문학작품은 천박하게 보이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은 과감하게 한글 일색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동백꽃’ ‘봄·봄’ ‘산골나그네’ ‘소낙비’ 등 4편이나 실리고 대학입시에 가장 단골로 많이 출제 되었던 것이 ‘봄·봄’이라고 한다.  

나의 이목을 끈 것은 바로 김유정이 처음으로 입맞춤대신 ‘뽀뽀’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의 단편소설 ‘산골나그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참새들은 소란히 지저귄다. 지직바닥(기직바닥)이 부스럼 자죽(자국)보다 질배(진배)없다....뜰에서는 나그네(본 작품에서 나그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십시게유.”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나두.”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말 ‘뽀뽀’의 원조이며 1961년 국어사전에 ‘뽀뽀’가 처음 정식으로 올랐다고 한다.

이 밖에 김유정 문학촌에는 한지, 한복, 도자기, 만화를 주제로 하는 민속 공예체험방이 각각 문을 열고 간단한 소품을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또 김유정 문학촌 외각을 걷는 설레이야기 길이 16마당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문학촌을 자세히 보려면 하루 종일 걸려도 부족할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김유정문화촌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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