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낙엽이 지던 날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낙엽이 지던 날

나뭇잎들이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고/ 안녕을 외치는 가을입니다./삶의 마지막을 더욱 더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은행 잎은 노란 옷을 입기 위해/ 여름날의 찬란함도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단풍 잎은 붉은 옷을 입기 위해/ 마지막 남아있는 생명까지/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가을 거리에 외로움으로 흔들리며/ 쏟아져 내리는 낙엽들..../ 우리의 남은 이야기를 다 하기에도/ 이 가을은 너무나 빨리 흐르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용혜원의 시, "낙엽이 지던 날") 

가을은 너무나 짧고 빨리 지나간다. 봄도 마찬가지로 봄이 오나 했더니 어느새 여름으로 접으로 접어들고 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 생명이 아주 짧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 


사철 중에 봄과 가을은 유달리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연세대 재학 시절에 시간이 나면 학교 뒷산으로 들어가 자연 속에 파묻혀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다음 시간을 빼먹고 돌아다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는 학교 건물이 4개 뿐이어서 건물들이 숲속에 파묻혀 있는것처럼 작게 보였다. 


오래된 본관 건물 3개(문과대, 상경대, 신과대)는 담쟁이가 우거지고 건물 벽을 덮어서 창문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건물 입구는 대리석 아치로 되었는데 담쟁이넝쿨이 콘크리트 아치로 몇 줄기 늘어지기도 했다. 특히 가을이면 위에 소개한 시처럼 안녕을 외치는 듯 고단하게 줄기와 잎새들을 물들이고 늘어져 있었다. 


신촌 로타리 버스정거장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려면 꽤 시간이 걸렸다. 특히 공부 시작시간이 촉박할 때는 뛰다시피 백양로를 지나 교실로 들어갔다. 어떤 때는 이미 담당 교수님이 출석을 부른 뒤에 교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대부분은 영락없이 삼각형 표시를 하여 지각으로 출석부에 남겼다. 대학에서 매시간 출석을 부른 것은 우리 연세대 뿐이었다. 


하여간 봄철에 뒷동산에 꽃들이 만발하거나 가을 철에 단풍이 곱게 들면 공부 시간에도 뒷동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세대는 창립 당시부터 기독교 학교(미국 북장로교 계통, 언더우드 선교사가 창립)인지라 입학하면 기독교 교육에 입각한 규칙을 준수할 것을 손을 들고 맹세했다. 학업을 계속하면서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총장실로 호출되어 직접 총장이 면책한다. 


그 전에 미리 입학 당시에 서명한 서약서를 내놓고 읽어보라고 한다. 꼼짝 못하고 처벌만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학업 성적이 좋고 출석 상황이 좋으면 면책 정도로 끝나지만 성적과 출석 상황이 좋지 않으면 정학 내지는 퇴학 처분을 받기도 한다. 우리반은 30명 정원에 여학생이 10명이고 남학생이 20명이었다. 


그 당시 남학생들은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면 특혜를 주었는데 근무기간을 18개월로 단축시켜줬다. 그래서 많은 남학생들이 중간에 군에 자원입대를 했는데 나는 그냥 4년을 계속 다녔고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후에 군에 지원했다. 물론 그 바람에 에누리 없이 36개월 군 복무를 했다. 어쨌거나 그래도 그 시절엔 지루한 것이 없이, 아주 재미 있게 학창 생활을 했다. 


요즘에 우연히 용혜원의 시를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뒷동산에 낙엽이 지면 거의 무릎까지 마른 잎들이 쌓여있다. 그 낙엽 속에서 뒹굴며 놀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고, 혹은 소설을 읽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연세춘추(학교 신문)에 영화나 연극 평을 쓰기도 했다. 


그 시절에 공보부 외화과에서 외국 영화가 들어오면 심사위원들이 모였다. 말하자면 가위질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하나도 짤리지 않은 외화를 보면서 일반인들에게는 교육상 어쩌니 어쩌니 하면서 가위질을 했다. 어쨌든 나는 가위질을 하지 않은 영화를 보면서 어떤 장면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했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섹스 장면도 심심챦게 있었다. 


낙엽이 지던 날을 쓰면서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하여간 낙엽이 지는 가을에는 우리 젊은이들도 마음이 쓸쓸하고 고독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직하고 세월을 따라 사는 나무들은 자연법칙을 잘 지킨다. 봄철의 나긋나긋한 잎으로 시작하여 무성한 여름 숲을 만들고 그 다음엔 연분홍의 가을옷으로 갈아입힌다. 여름날의 찬란함도 잊어버리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런 세월을 반복하면서 나무는 자라고 우리 인간들은 늙어간다. 이 땅에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이런 세월을 반복하다가 간다. 낙엽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잎을 물들이고 그 다음엔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겨울을 지낸다. 물론 이듬해 봄엔 다시 시작하지만.... 


나무들은 그들의 삶의 마지막을 더욱 더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병들어 가면서 아름다운 색으로 잎(옷)을 갈아입힌다. 우리 인간도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일생의 삶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그리고 멋있게 나 자신을 남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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