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국어사랑‧나라사랑(1)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국어사랑‧나라사랑(1)

대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된다. 학기말시험을 치르는데 가장 점수 따기 힘든 최현배 박사님의 우리말본 과목 시험시간이 되었다. 최 박사님이 직접 시험감독으로 들어왔으므로 우리들은 숨도 크게 못 쉬고 문제지를 기다렸다. 시험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최 박사님이 칠판에 단 두 문제를 내주었다. 


첫째 문제는 우리나라 애국가 1절을 쓰라는 것이었고, 둘째 문제는 ‘우리 한글의 자랑거리’라는 제목하에 500자 이내로 글짓기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너무나 쉬운 문제를 받아서 모두 쿡쿡대고 웃었다. 나중에 점수가 나왔는데 낙제점(60점) 이상 받은 학생이 30명 중에 2명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찾아가 시험 답안지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다음 시간에 최 박사님이 직접 모두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답안지를 받은 우리들은 모두 입을 벌릴 수밖 에 없었다. 애국가를 문법대로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받침, 띄어쓰기, 줄맞추기, 점과 종지부 등을 제대로 맞게 쓴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최고 점수인 82점을 받았는데 대부분 동급생들은 점수를 못 받아 재시험을 치렀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애국가 1절이다. 초등학교 1학년생도 쓸 수 있는 쉬운 애국가지만 이것을 문법과 철자법에 맞게 쓰기는 참말로 어렵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도 한번 우리 애국가를 써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자신 있게 100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에게 점수를 매겨 보도록 신문사로 보내시기를 바란다. 


10월 9일은 우리나라가 해마다 한글날로 지키며 한글을 창제 한 세종대왕의 높은 뜻을 기리는 날이다. 이날은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고 한글 창제의 의의나 한글의 과학성, 조직성, 글체의 아름다움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말 자체의 아름다움을 고취시키고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은 별로 없다. 


우리말이 외국말에 비해 얼마나 아름다우며, 표현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문자의 자랑만을 늘어 놓고, 말의 자랑은 하지 않는다. 우리말의 자랑은 고사하고 오히려 천시하며 깔보는 경향이 짙다. 우리가 옛날부터 쓰던 좋은 말들이 많은데 슬그머니 없어졌다 

말은 쓰지 않으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말과 글은 갈고 닦으면 빛이 난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도 쓰지 않으면 사장된다. 우리말이 아름답다고만 입으로 떠들어 보아야 소용이 없고, 그 아름다운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말은 발달한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영어나 일본어로, 혹은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식 표현으로 쓴다면 본래 우리말은 없어지게 된다. 


지금 뫼(산), 가람(강) 등의 단어는 거의 없어졌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죽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할 때 외국어를 많이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해야만 유식한 줄 알고 있다. 글을 쓸 때도 일부러 어려운 한자나 외래어를 곁들여 써야만 유식하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 반대이다. 물론 우리말로 표현하면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괄호 안에 설명을 써 넣으면 된다. 꼭 영어표현이 필요할 때는 영어를 괄호 안에 써 넣으면 되는데 우리말은 아예 집어치우고 영어만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우리말 반 외래어 반의 혼 합 문장이 될 것이다. 어느 신문에서 우리나라 잡지들의 이름을 조사하여 소개한 일이 있는데 90% 이상이 외국잡지 이름을 그냥 우리말로 적었다. 


우먼센스, 엘레강스, 엘르, 영레이디, 하이틴, 여성저널, 골프웍 등 무려 60여 종의 외국어 표기 잡지가 우리나라 책방에 나돌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말로 번역을 해도 되는데 꼭 외국어 발음대로 잡지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종대왕이 이런 잡지들을 본다면 참으로 기가 찰 것이다.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서로 뜻을 통하기가 어려워서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28자를 만들어 국민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쓰게하기 위해 한글을 펴냈다고 훈민정음 서문에 밝혔는데 지금 우리들은 쉽고 좋은 글, 아름다운 표현이 간편한 말을 두고도 다시 어려운 외국어인 영어로 쓰고 있음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영어를 모르는 세대나 공부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은 '엘르'가 무엇인지, '우먼센스'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일제하에서 우리 글과 말을 끝까지 지키고 쓰다가 잡혀가서 3-5년의 옥고를 치르고 혹은 옥사까지 하면서 싸운 한글학회(구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큰 뜻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함부로 우리 말과 글을 경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말처럼 표현이 많고 실감이 나는 말은 다시 없다. 특히 의태어와 의성어의 경우는 다른 나라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자. 


노릇노릇, 파릇파릇, 불그레, 들락날락, 거슴츠레, 거무스름하게, 아장아장, 출렁출렁, 오락가락, 올똥말똥, 건건찝질, 몽실몽실 등 수도 없이 많은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에 알맞은 외국어는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로도 위에 적은 단어들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언어는 감정 표현의 기호이므로 인간의 감정이나 사물의 모습과 맛, 생김새 등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을수록 발달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함을 엿볼 수 있다. 그냥 새카만 것이 아니라 검은 것도 있고, 거무스름한 것도 있으며, 아주 새카만 것도 있는 것이 우리말인데 영어로는 이런 표현을 black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영어로도 litle black이니 dark black, concrete black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런 영어 단어들이 우리말의 표현과 꼭 맞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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