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란 장례] 삶의 끝을 준비하는 용기와 지혜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수많은 내 몸 안에 세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성인들의 머리 속의 뇌세포는 평균 매 시간마다 50,000개가 사라져 간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은 놀라운 기술로 생명을 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환자실(ICU)은 "생명을 구하는 곳"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과연 생명을 ‘구하는’ 것일까요?
그저 죽음을 미루고, 길을 우회하게 할 뿐입니다.
결국, 누구도 영원히 생명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중요한 대화가 빠져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가 부재한 것입니다.
4,000명의 요양원 입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심장이 멈췄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한 사람은 고작 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심각한 병에 걸렸을 경우의 지침을 남긴 사람은 그보다도 적었습니다.
공공의 영역에서도 이런 대화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방식은,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이한 가족들은 7배나 더 큰 스트레스를 겪는다고 합니다.
중환자실은 죽음을 맞이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5명 중 1명이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며,
노년층이 많은 마이애미같은 도시에서는 무려 5명 중 3명꼴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 급사 (매우 드물게 발생)
- 말기 질병 (젊은 층에서 더 흔하며, 80세 이상에서는 10%에 불과)
- 장기 부전 (심장, 폐, 신장 기능 저하로 인한 병원 집중 치료를 받게 됨)
- 노쇠 (가장 흔한 형태로, 10명 중 6명이 신체적 장애와 독립성 상실 가운데 생을 마감)
현대는 기대수명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더 긴 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더 긴 노년을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삶과 분리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것은 오해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를 대신해 말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을 시작으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준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이해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는 것 — 이것이 사랑이자 존엄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믿음과 사랑과 평화 속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