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김 칼럼]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군가는 한국민요 ‘아리랑’(1부)

전문가 칼럼

[엘리엇김 칼럼]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군가는 한국민요 ‘아리랑’(1부)

미 육군의 대표 군가 12곡 중 유일한 외국곡인 한국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6월 21일, 올림피아에 워싱턴 주정부 종합청사 Capitol campus 내에 있는 한국전 참전 추모공원에서 거행된 한국전 참전 워싱턴주 출신 전몰 장병 추도식에 참석한 포트 루이스 멕코드 합동 군사기지(JBLM)에 소재,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군가가 바로 한국의 아리랑입니다.


이날, 제7보병사단장 미셸 슈미트 장군(미 육군 소장)과 장병들 및 사단 의장대가 행사에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준 바 있습니다. 제7보병사단은 1950년, 6.25 남침이 발발한 후 한국전에 참전하여 1971년 미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21년간 한국에 주둔한 바 있습니다.


1956년 5월 26일, 한국에 주둔 중인 미 육군 제7보병사단에 장군 명령 제63호(General Order No.63)가 하달되었습니다. 한국의 민요를 “미 육군 제7사단 공식 군가로 지정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 최강의 미군이, 한국어도 제대로 몰랐던 그들이, 한국 민요를 군가로 채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더 놀라운 건, 그 노래가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는 매년 7월 27일, 한국전 휴전 기념일(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을 맞이하며 수천 명 앞에서 미군 군악대가 이 노래를 연주합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눈물로 따라 부르던 그 한국 노래, 70여 년 전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부른 이 노래가 어떻게 미군의 군가가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눈물겨운 감동적인 사연을 미국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미 육군 군악대 지휘자인 엘리사 벤틀리의 이야기로 알려드립니다.


지난해 가을 어느 토요일, 저는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집 다락방에서 두 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엔 먼지가 쌓인 나무 상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상자를 열자 그 안엔 할아버지의 낡은 군복과 훈장들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 옆에 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하얀 실트 스카프가 있었습니다.


그 스카프를 펼쳐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카프 중앙에는 지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나라 국기들이 둘러싸고 있었거든요.

태극기와 성조기도 그려져 있었어요.

가장 눈에 띄는 건 스카프 윗부분에 인쇄된 5선지 악보였습니다.


음표를 읽어보니 익숙한 선율이었어요.

저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멜로디가 흘러나왔죠.

바로 ‘아리랑’이었습니다.


왜 할아버지 유품에서 한국 노래가 나오는 걸까요?

저와 아버지는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것 외에는 한국과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는지 전혀 몰랐거든요.


그 스카프를 더 자세히 보니 모서리에 손글씨가 보였어요.

“한국을 떠나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국의 멜로디를 위해” -켈로웨이로부터- (-From Calloway- -For the melody that never left Korea-)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캘러웨이가 누구지? 하고 아버지가 중얼거렸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스카프가 정성스럽게 접혀서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께는 매우 소중한 물건이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어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돌아오신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셨고 술에 의존하게 되셨다는 이야기들...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한국전쟁이 우리 가족을 망쳤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 고통과 가족의 상처를 가져다준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 스카프는 뭔가 달랐어요.

손글씨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단순한 아픔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결심했어요.


할아버지의 복무 기록을 정식으로 신청해보자고 말이죠.

국방부 인사 기록 센터에 공식 신청서를 제출하고 2주 후에 할아버지의 복무 기록이 도착했어요.

“제임스 벤틀리 대위,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1950년 9월부터 1957년까지 한국 복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참여, 서울 탈환작전 등 주요 작전 참여 기록도 있었어요.

흥미로운 건 할아버지가 마지막에는 부대 행정업무와 사단 행사 기획에 참여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캘러웨이 장군이 1956년부터 7사단장을 역임했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궁금했던 점인 아리랑과 7사단의 연관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왜 사단장으로부터 이 스카프를 받게 되었는지,

할아버지가 왜 한국전이 끝나고도 4년간이나 더 한국에 계셨는지,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던 것 같았어요.


제임스 벤틀리 대위, 당시 23세였던 할아버지는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배에 오르고 있었어요.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배 안은 긴장감이 가득했고 수많은 장병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불안감을 달래고 있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총을 점검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이 성공한 후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한국군 카투사 한 명과 한 조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름은 박상호. 스물한 살의 카투사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군과 한국군 카투사 한 명씩 짝지어서 전투를 하는 ‘전우조’ 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만 보았다고 합니다.

말이 전혀 안 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선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했습니다.

박상호가 할아버지의 이름 ‘제임스’를 부르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할아버지도 따라 했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전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상호는 할아버지께 한국의 기후와 지형을 알려줬고, 할아버지는 박상호에게 미군의 무기사용법과 부대 제식을 가르쳐 줬어요.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과 몸짓, 그리고 서로를 위한 배려로 의사소통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할아버지가 휴식 시간에 코를 골면 박상호가 웃었고 박상호가 한국 음식을 나눠주면 할아버지가 고마워했죠.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부대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박상호가 혼자 앉아 뭔가를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멜로디가 아름다웠습니다.


슬프면서도 따뜻한, 그리운 듯하면서도 희망적인 선율이었죠.

할아버지가 다가가자 박상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노래 들어보셨습니까? 아리랑입니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그 멜로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일기에 적어두셨어요.

박상호는 손짓을 섞어가며 아리랑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부터 할아버지도 아리랑을 따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아리랑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함께 나눴죠.

인천상륙 작전 후 할아버지와 박상호는 서울로 향하는 부대에 합류하였습니다.

서울 외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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