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김의 감성과 지성] 해방된 자아의 견실함으로 가득한 (2)

전문가 칼럼

[엘리엇 김의 감성과 지성] 해방된 자아의 견실함으로 가득한 (2)

<지난 호에 이어>


이렇게 노예는 패전한 적국의 백성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예들에겐 “I’ve lived as a slave but die as a freeman. 나는 노예로 살아왔지만 자유인으로 죽는다.”가 바로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 놓인 절대 명제였다. 죽음만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였으니까. 조선조 후기엔 인구 절반 이상이 노비였다고 한다. 수도 한양은 노비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조는 약자적 계층에 있던 자국민을 노비로 삼는, 세계 역사상 많지 않은 자생적 노비국가였던 것이다. 그뿐이랴. 조선은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고 주자학을 국가 통치의 패러다임으로 삼았다. 이는 절대군주는 문자 그대로 주인이자 씨다른 아버지였으며 백성은 국민이 아닌 신민(臣民)으로서 군주와 그 권력핵의 소유물이었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순종 황제의 신민들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의 신민이 되었다. 즉, 서민 백성들에겐 주인이 순종에서 메이지로 바뀐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절대군주의 소유물인 신민이 자유인으로서의 국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국호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절대왕정 군주제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바뀌게 되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이 열리는, 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는 날이었으며, 백성들은 수천 년간 내려오던 군주의 소유물인 신민에서 자유인인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유인이 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해방을 맞이한 국민은 “I’ve lived as a freeman, I die as a freeman.”이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1945년 8월 15일, 모국 대한민국의 해방이 가져다준 수천 년 유사 이래 최고의 선물이자 축복인 것이다. 광복 80주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필연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 우리가 기쁨으로 부르는 해방의 ‘나부코’는 이탈리아 베르디의 ‘나부코’가 아니다. 우리의 ‘나부코’는 해방된 자아의 견실함으로 가득 찬 환희의 ‘나부코’여야 한다.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축하, 기념하는 오늘의 콘서트에 이 곡을 선곡하신 지휘자님과 모든 합창단원님들께 큰 감사를 드린다. 참 잘하셨다.


‘강 건너 봄이 오듯’!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나의 봄 노래다. 봄이면 언제나 이 노래를 제일 많이 듣는다. 그만큼 난 이 노래와 사랑에 빠져 있다. “봄의 노래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봄의 노래들은 생각지 말라. 그대는 그대의 음악이 있으리

니… Where are the songs of spring? Ay, where are they? Think not of them, thou hast thy music too…” 내가 참 좋아하는 영국 시인 John Keats의 시 ‘가을에게(To Autumn)’ 중 좋아하는 한 구절이다. 하지만 이 가을에도 나에겐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바로 ‘강 건너 봄이 오듯’이다.


송길자님의 이 아름다운 시와 임긍수님의 황홀한 작곡 음악의 조화, 이 시에 꼭 맞는 수려한 음악이자 이 음악에 꼭 맞는 예쁜 시다. 이 노래만큼은 계절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나에겐 그렇다. 이 가을에 군밤을 까먹으며 들어도 좋고, 한겨울에 군고구마를 호호 하고 벗겨 먹으며 들어도 좋다. 


나의 인생도 어차피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처럼 기다림의 인생이니까. 봄을 기다리니까. 2019년 2월에 제작된 KBS의 ‘백년의 봄’ 공연 중 조수미님이 부르신 이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 이 노래는 특별히 톤이 높은 노래다. 소프라노나 하이 테너에 어울리는 노래다. 그래서 조수미님처럼 기절하기 직전에 지르는 소리 같은, 인간이 맨정신에 낼 수 있는 최고의 옥타브까지 올라가는 노래라 독창곡이 많다. 


하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운 좋게 합창곡으로 들어본다. 합창에서 그 높은 옥타브 처리를 어떻게 할까 하는 우려와 호기심이 생긴다. 특히 저기 한참 뒷부분에 가서 “짐 실은 배가 저만큼, 새벽 안개 쳐 왔네…” 하는 부분이 궁금해진다. 그 부분은 웬만한 발성 연습으로는 ‘울고 넘는 미아리고개’ 꼴이 난다. 


그만큼 힘들다. 그러나 합창이 매끄럽게 참 잘 넘어갔다. 큰 수고들 하셨으리라고 확신한다. 주로 독창곡으로 감상하는 이 노래는 우리 동네 저 아래를 흘러 바다로 이어지는, 메이플과 포플라 나무들의 새싹이 돋아나는 봄날의 작고 가는 니스퀄리 강변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오늘의 이 합창은 나를 거대한 컬럼비아 강가로 데려간 감흥이었다. 합창의 위력은 바로 이것이다.


지난해 작고하신 고 김민기님의 ‘상록수’를 마지막으로 감동 속에서 콘서트의 막을 내렸다. 나는 김민기님의 노래를 참 좋아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도 행동하지는 못하고 몸부림만 치던 젊은 지성의 7080 세대를 대신하여 그들의 속마음을 시로 쓰신 후 작곡하신 음악 속에 고이 담아 말없이 나눠 주신 우리 세대의 착한 영웅이었다. 특히, 김민기님의 ‘친구’와 ‘아침이슬’은 나의 애창곡들 중에 들어 있다. 


나의 애창곡들은 언제나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보는 곡들이다. 김민기님의 이 좋은 많은 곡들이 반세기 전에는 ‘불순한 금지곡’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렵고 염려스러워 노래 자체를 금지시켰을까? 칼자루 쥔 자들이 스스로 정형화시켜 둔 ‘이념과 통치 철학’이라는 시각으로 예술을 보았을 때 염려와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예술 앞에 스스로의 무지함과 몰문화의 나약함이 두려웠던 것이다. 


파시즘, 전체주의, 국가 사회주의가 항상 범하는 웃지 못할 코미디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예술에 대한 통행금지, 함구령, 계엄령이 바로 그런 코미디인 것이다. 삶을 표현하는 인식의 기술인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발견해 내는 미(美)의 감성 작업이다. 예술은 통치 철학의 만만한 훈련 대상이거나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이 통치 철학의 도구가 된다면 그때부터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프로파간다가 되어버린다. 


부끄러운 과거이다. 야만의 상징이자 몰문화의 표징들을 우리 7080 세대들도 철들며 많이 보고 자라왔다. 제발 앞으로는 누구든지 그러지들 마라. 곡을 마친 후 김유승 지휘자님이 무대 옆 파우더룸 쪽으로 들어갔다. 청중들은 “앵콜! 앵콜!” 박수치며 난리다. 원래 공연 때는 이렇게들 한다. 몸값을 높여야지. 얼른 나와도 안 된다. 뜸을 좀 들여야지. 드디어 나오셨다. 앵콜곡이 뭘까? 관객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

‘할렐루야!’


관객들은 잠시 순간적인 혼돈에 빠지는 것 같다. 기립하는 반응 속도를 보니 그렇다. 할렐루야 기립 봉청의 역사는 1750년,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델의 기나긴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제2부의 마지막 ‘할렐루야’가 합창될 때, 당시 조지 2세 영국 황제가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부동자세로 감상하는 바람에 모든 청중들도 따라 일어나 차렷 부동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이 같은 전통으로 크리스천들은 ‘할렐루야’ 합창 대목에선 차렷 부동자세로 봉청하는 음악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나 역시 조건반사적으로 기립 부동자세로 봉청하게 된다. 이 장엄하고도 가슴이 떨리는 ‘할렐루야’ 합창을 봉청하며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긍심과, 크리스천으로서의 특권이자 의무를 한껏 기쁨으로 느낀다. 


국가를 선택하여 가진 국민으로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애국가 봉창과 같은 국민의례를 하는 느낌이라 할까, 절대자 앞에서의 나를 확인하고 내가 절대자를 믿음의 지존으로 확인하는 엄숙한 무언의 경배가 ‘할렐루야’ 합창을 통해 차렷! 부동자세로 온몸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의식화되는 것일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엄하고도 경건한 찬송,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메시아의 존재를 합창으로써 증명한 ‘할렐루야’, 노예의 굴레와 속박의 사슬을 끊어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한 메시아를 찬양하는 ‘할렐루야’….


어느덧 어두워진, 눈이 부시게 푸르던 오늘의 하늘 아래에서 Washington Choral의 감격적인 합창 공연을 향해 나는 보름 전날의 밝은 둥근달과 함께 이렇게 피날레를 고한다. Adieu…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해. 오늘 저녁처럼 말이야…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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