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문학칼럼] 이난영과 그의 노래비 - 시애틀한인로컬문학칼럼
이난영과 그의 노래비
이성수(수필가)
목포 관광을 가서 유달산 중턱에 위치한 이난영 노래비를 답사했다. 이곳에 오르니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유달산에서 수도(修道)하던 선비를 사모한 세 처녀가 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 삼학도가 발아래, 그리고 다도해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자리 잡고 있는 유달산(해발 228m)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전 지역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위 돌산이다. 그 산에 우뚝 선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외에도 시원스레 펼쳐진 다도해의 절경을 배경으로 예술인들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 앞에 섰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노래가 취입 당시의 생생한 음성으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이난영의 지금 목소리와 목포 유달산의 노래비 속에서 나오는 축음기 소리가 일치하였다. 그 간드러지게 울리는 특이한 비음(鼻音)으로 애절하게 들리는 노랫소리...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가왕 이난영 노랫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노래비는 1935년 취입 당시 가사를 쓴 노래와 지금의 목포의 눈물의 노래 가사가 나란히 새겨 있었다.
85년 전에 취입한 노래 가사를 읽어보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삼학도 파도 급히 스며드는데
리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서름
삼백련 원안풍(三栢淵願安風)은 로적봉 밋헤 님 자최 완연하다 애닯흔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아느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깁흔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지타 녯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막간가수(幕間歌手)이며 무명가수(無名歌手)였던 이난영은 10대 후반 때 극단단원으로 일본 공연을 갔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난영의 가성에 특유의 비음(鼻音) 섞인 애절한 음색으로 흐느끼는 듯한 창법의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서려 있는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난영의 또 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명곡으로 남아 있다.
이난영은 남인수와 함께 100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든 가수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대표적 인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 잘 알려져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또한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이난영이 처음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 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젊어서나 늙어가면서나 늘 애창하는 노래이다. 언제 들어 봐도 또 듣고 싶은 노래이다.
목포역에 기차가 닿으면 이 노래가 들리고 또 여객선이 목포를 떠나면서, 들어오면서 이 노래를 들려준다. 아니 목포 어디서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목포의 노랫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난영의 노래비엔 이난영의 노래와 함께 그의 생애가 점철되어 있다.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공업을 하고 있었고 위로 오빠가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으며 집안에 관심이 없었다.
이난영은 목포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 다닐 적의 이난영의 학적부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던 이옥례(李玉禮)가 아닌 이옥순(李玉順)이었다. 대부분의 교과목의 점수는 3점부터 8점까지 다양하였는데, 음악인 창가(昌歌)의 점수만 유일하게 9점의 높은 점수를 받아, 어릴 때부터 노래에 두각을 나타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난영은 4학년이 되어 아버지의 술과 불화를 참지 못해 먼저 목포 집을 떠나 제주도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당시 어머니는 제주도에서 극장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사람의 가정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 이난영은 어머니를 따라 허드렛일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노래를 들은 집주인은 노래에 소질이 있는 아이인 것을 알고 극장의 막간(幕間)가수로 활동을 하게 해주고, 오빠는 영사기 기사(技士)로 일을 하게 했다. 이 극장은 제주에 위치한 까닭에 갑작스럽게 날씨 변동이 새길 때 배가 올 수 없어 영화의 필름이 도착하지 못할 경우 그곳에서 유랑극단이 펼쳐졌는데, 그 사이사이마다 막간 가수로 이난영이 노래를 불렀다. 유랑극단은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악극단이었다.
그러던 중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이난영은 극장 주인의 추천으로 삼천리가극단의 특별 단원이 되어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이난영은 삼천리가극단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양극장(太陽劇場)에 가입해 막간가수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태양극장의 단장이 이난영이라는 예명(藝名)을 지어주었다.
그 후 OK레코드에 스카우트 되었고, 이난영의 아버지는 1933년 8월, 딸의 데뷔곡이 나오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OK레코드와의 전속 계약을 체결한 후 이난영은 ‘불사조’에 이어 ’봄맞이’를 불러 히트를 처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유일한 한국인 가수로 이난영 혼자 출전하기까지 하였다.
1935년 초에는 OK레코드와 조선일보가 주관한 향토 노래 현상(조선 10대 도시[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을 모집해 3,000:1로 목포에 살고 있던 시인 문일석(文一石)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된 가사가 〈목포의 눈물〉과〈부산 노래〉 <평양 행진곡〉이었다.
한편 목포 출신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불러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노래를 발표한 지 한 달 만에 10대 가수에 3위로 이름이 올랐으며, 5만 장의 음반이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또 일본에서까지도 큰 반응을 얻게 되는 등 이난영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같은 가수였던 김해송과 결혼을 하였다. 이난영은 결혼을 준비하는 사이에도 영화를 촬영하고 노래를 많이 취입하였는데, 1936년 초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서 ‘아버지는 어데로’를 취입하였다. 아버지가 궁핍한 처지에 약 한 첩 사 드시지 못하고 사별한 것을 괴로워하며 노래를 불렀다.
해방 후 KPT 악단에서 활약하고 미군 위문공연도 하였다. 6,25전쟁 때 미처 피란을 못 간 남편 김해송은 납북된 후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간 이난영은 미군의 위문공연을 다니면서 자녀들을 혹독하게 교육시켰다.
KPK악극단이 춘천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이난영은 밤에 소양강 백사장에다 <나는 갑니다. 김해송>이라는 글을 적어 놓고 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마침 순찰 중인 순경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후 이난영은 술과 아편 등에 중독되어 피폐한 삶을 사는 중에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게 되었다. 남인수와의 사랑은 남인수의 심각한 폐결핵으로 인해 오래 가지 못하였다. 비록 짧은 기한이었지만, 둘은 깊은 사랑을 하였고, 결국 남인수는 이난영의 무릎을 벤 채 43세로 사망하였고 이난영은 더욱 심한 우울증으로 2~3년간 고생하다가 48세에 서울 회현동에서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하게 혼자 타계하였다.
유족으로 미국에 살고 있는 김시스터즈와 김 보이즈의 4남 3녀가 있지만,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화려한 가왕 이난영의 생애는 실로 파란만장하였다. 목포에서 나서 목포의 눈물을 그토록 많이 불렀지만, 목포가 아닌 서울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몸은 목포가 아닌 경기도 파주 묘소에 묻혔는데 41년 후인 2006년에 목포로 이장하였다.
나는 유달산 이난영의 노래비 앞에서 흐느끼듯 들려오는 목포의 눈물을 듣고 있다. 세월이 갈수록 이난영은 불후의 명곡 목포의 눈물과 함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