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 칼럼] <濟州 4·3 事件>과 <여순 반란사건>
지난 4월 3일은 <제주 4·3사건>이 발생한지 72주년 되는 날이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같은 해 10월 19에 발생한 <여순 반란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특기할 역사적 중대 사건이다. <제주 4·3사건>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4개월 뒤인 8월 15일에 수립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동시 제주도를 자기들의 대남 공작의 기지로 만들고자 인민군 공작대와 특수요원을 은밀히 남파(南派)해 현지 남로당 공작 요원들과 짜고서 주민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다. 이 폭동에서 북조선 공작요원들은 현지 주민을 앞장세웠기 때문에 애꿎은 양민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이들 폭도는 경찰서를 공격하는 동시 경찰 가족을 사살하면서 시작했다. 이에 우리 국방경비대가 출동해 진압 작전을 전개하자 이들 폭도는 일제시대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때에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한라산 일대에 구축한 동굴에 숨어 게릴라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폭도는 낮에는 동굴에 잠복했다가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민가를 약탈하고, 우리 국방경비대를 습격하기 때문에 소탕작전은 장기화 조짐을 나타냈다. 이에 정부는 이 폭도를 조속히 섬멸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를 이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출동하는 과정에서 군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던 남로당 공작요원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이른바 <여순 반란사건>인 것이다. 출동명령을 받은 14연대는 제주도를 향해 10월 19일에 여수항의 부두에 집결해 승선하고자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이때 남로당 세포조직의 일원인 14연대 인사계 특무상사 <지창수>가 뛰쳐나와 “북조선 인민군이 곧 남조선을 해방시킬 것이니 우리는 동족상잔의 싸움터인 제주도에 가서는 안된다”고 외쳤다. 이렇게 외치는 순간 대열의 곳곳에 미리 잠복해 있던 남로당 계열의 군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저항하는 동료 장병들을 사살하고, 여수 시내에 진출했다. 여수를 장악한 반란군은 경찰과 우익진영의 인사들을 학살하고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음 날(10월 20일)에 순천을 점령하고, 연이어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까지 장악했으나 국군의 반격으로 1주일 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토벌군에 쫓긴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피해 공비가 되었다. 지리산에는 6·25전쟁에서 패주한 인민군 패잔병도 떼지어 도피해 지리산에는 공비가 우글거렸다. <여순 반란사건>은 이와 같이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제까지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계 군인들이 여지없이 노출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이 기회에 숙군(肅軍)조치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던 것이다. 이 숙군조치 과정에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처에서 복무하던 박정희 소령도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조사 결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만약 이 <여순 반란사건>이 발생하지 안았더라면 군 내부에 잠복해 있던 남로당계 군인들이 6·25전쟁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켜 인민군에 합세했을 것을 생각하면 진실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러한 기적 같은 사건이 1948년에 대한민국 건국 당시에 몇 차례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다음 해인 1949년 6월 30일을 기해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는 동시 한국을 극동 방위선(애치슨 라인)에서 제외시켰다. 이렇게 미국이 남조선에서 손을 떼자 이에 고무된 북조선의 김일성은 소련 모스코바에 가서 스탈린에게 군비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스탈린은 지원을 약속하는 동시, 중국의 모택동과도 의논하라고 귀띔까지 했다. 이리하여 인민군은 바로 다음 해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소련이 지원한 T-34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공격해 왔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인민군은 남침 3일만인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서는 웬일인지 전진하지 않고 3일 동안이나 서울 시내에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3일 동안 서울에 머문 까닭은 인민군이 나타나면 남조선의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할 것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봉기를 하기커녕 오히려 강력한 방공세력이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최우선 과제로 단행한 <농지개혁>의 덕분이다. 이와 같이 8·15광복 당시에 겪은 위기를 오늘에 와서 회고하면 진실로 아슬아슬한 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