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살이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에 대하여’

전문가 칼럼

‘미국살이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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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일의 ‘아메리카 아르니카’(1) – 세상과 세상,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앙 네트워크에 미주 250만 한인과 더불어 또 다른 백년대계를 꿈꿀 ‘상생과 융합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이민사회의 담론을 네트워크로 쌓아갈 새로운 발걸음을 선뜻 내딛은 안동일(재외동포저널 이사, 뉴욕 라디오 코리아 방송위원) 기자가 빗장을 엽니다.(편집자 주)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또 모국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 동포들에게 미국은 아직 살만한 땅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미국은 아직은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자 기회의 땅이며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교사(敎師)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3년 필자는 서울의 한 인터넷 신문에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라는 글을 연재 했었다.

태평양을 두 번 건넌다. 무슨 말일까? 한 번 건넌 사람들은 우리처럼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 들이고 두 번 건넌 사람이란 동포 출신으로 다시 서울에 돌아간 이른바 역이민한 귀국 동포를 의미해 사용한 말이었다. 


당시에는 박지원 실장이며 김경재 의원, 김혁규 지사, 유종근 지사, 유재건 의원 등 미주동포 출신 인사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 진출해 있었기에 이들의 미국생활을 중심으로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연을 전해 꽤 큰 반응을 얻었었다.

우리들 동포들의 입장에서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려 하지 않고 서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기에 역이민을 딱 잘라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하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글들은 꽤나 시니컬했었다는 기억이다.

그랬던 필자야말로 태평양을 세 번 건너야 했다. 이민생활을 접고 고국에 영구 귀국했지만 다시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다.

지난 1981년에 도미한 필자는 2003년 귀국하기까지 20여년을 동포 언론인으로 지냈다. 일간 신문사에서도 일했고 라디오 TV방송에서도 오래 일했다. 80년대 초반에는 광주민주 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기획기사를 1백회 넘게 연재했었고, 시민권을 획득한 88년부터는 북한 취재에 나서 꽤 성과를 올렸다. 그 중에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양 행적기는 이른바 낙양의 지가를 올린 특종이었다. 이 때문에 한때 서울 입국 금지가 되고 다니던 신문사에서 면직되기도 했지만...

그 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한때 역동적으로 나갔던 한 국내 일간지의 주미 특파원으로 위촉돼 유엔본부며 워싱턴 캐피탈 힐을 들락거렸다. 네 차례에 걸친 방북 취재기를 출간했고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발표해 TV 드라마화까지 되기도 했었다.
시민권을 반납하고 보따리를 싸 모국으로 영구 귀국을 했던 때는 미국생활 22년이 되던 2003년 6월,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던 그 시기였다.

곰보도 보조개로 보이던 시절을 지나

2003년 귀국했을 때는 모든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조국의 발전이 대견스러웠고 사회간접자본이며 시민의식의 성장이 무척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필자 자신도 희망에 넘쳐 있었다. 돌아온 조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고국생활 15여년이 넘어가면서 필자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고국의 일도 상황도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이던 그런 시절이 한참 지나 있었다. 그리고 현 상황, 미국에서는 동포로서 할 일이 많았다.

아무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주권을 다시 신청하려 했을 때 걱정이 앞섰다. 아다시피 그사이 미국의 상황도 꽤 많이 변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미국이 예전처럼 그렇게 녹록치 않다고 했다. 특히 트럼프 집권 이후 반이민 정서가 팽배하다고 했다. 걸핏하면 추방이라고 했다.

또 무엇보다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한 번 포기한 사람은 다시 그것을 발급받을 수 없다는 괴담 수준의 말이 팽배했다.

하긴 미국사람들, 미 정부의 자국민, 시민에 대한 일종의 장악력과 그에 상응하는 배려와 특권 부여는 알아줘야 한다. 시민권을 반납할 때의 어려움이란, 최소 3번에서 6번의 인터뷰를 한다. “당신은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선서하지 않았느냐?” “이 중요한 결정이 당신의 자유의지가 분명한가?” “다른 사람의 강요는 없었는가?” “알았으니 마음 변하지 않으면 두 달 후에 다시 와라”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LA에 사는 이곳 출생 큰딸이 스폰서가 된 영주권 신청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터뷰 때 영사가 왜 시민권을 포기했었냐고 한마디 하기는 했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국의 ‘콩그레스맨(Congress man)’이 되려 했었다고...

“그래서 되셨습니까?”

“왠걸요, 뒤통수만 맞았습니다.”

초록눈 구렛나루의 영사는 크게 웃었다.

시민권 포기할 때 썼던 영문편지가 주효했다. 그 오랜 서류들을 다 보관했던 모양이다.
그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었다.

‘본인이 그간 미국에서 배운 민주주의 정신이며 실용적 인본주의 정신, 무엇보다 정직을 숭상하는 그 정신을 이곳에 전파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그것은 나의 두 조국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랬다. 이곳 미국에서 정직은 최고의 모토다.

태평양을 세 번째 건너 미국에 다시 돌아온 지난 11월 이래 지금까지 필자는 크고 작은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필수품 운전면허를 다시 따기 위한 소동과 아파트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랬고 또 다른 하나는 아내의 비자문제였다. 하지만 남들의 괴담과는 달리 모든 것이 정직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내 믿음대로 풀려갔고 나는 지금 자랑스런 재미동포가 되기 위해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조국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묻기 전에 나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자.’는 말을 되새김 하고 있다.

(필자 주) 아메리카 아르니카는 ‘아메리카를 아십니까’ 또는 ‘아메리카를 알고 있으니까’의 라임(rhyme)을 맞춘 제목이다.

<필자에 대하여>

서울 출생으로 서울 동국대학교 철학과(77년 입학)를 거쳐 미국 뉴욕 시립대학 메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다녔고 뉴저지 페얼리 디킨슨 대학 국제관계센터의 연구교수를 지냈다.

198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미주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 교포 언론계서 활동했으며 서울 민주일보 주미특파원을 지냈다.

북한, 쿠바, 중국, 소련, 니키라구아 등 공산권 국가를 방문해 각종 매체에 취재기를 발표했고 방북 경험을 토대로 한 통일염원 소설 ‘해빙’(서울 돌베개간 전 3권)을 93년 7월에 발표했으며 이 소설은 그 후 서울의 SBS-TV에 의해 16부작 미니 시리즈로 드라마화 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96년부터 뉴욕의 동포 라디오 방송 라디오 서울의 시사 프로 ‘시사자키’와 자매 회사인 K-TV의 저녁 종합뉴스, 주말 토크쇼 ‘토요초대석’을 7년 넘게 진행해오다 2003년 7월 서울로 영구 귀국했다.

귀국 후 개혁 국민정당 대변인을 맡았고 열린 우리당 창당발기인, 대외협력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 송파에 E-정치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현실정치 참여에 뜻을 두기도 했으나 서울 마천동 남한산성 산자락 우거에서 창작과 집필에 전념해 ‘구루의 물길’ ‘조선여인 금원’등 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2018년 11월 미국으로 돌아와 뉴저지 레오니아에 정착해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한 큰 그림의 일을 구상하고 있다.

연락처 ahndo7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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