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 태어난 지영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장을 가야 하는 이유’
내가 만난 지영은 굳이 자신의 나이를 일러주지 않았다. 82년생은 아니다. 이곳 미국은 공직에 출마하면서도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선거 포스터에도 홍보물에도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지역방송의 앵커우먼 출신인 지영은 지금 미국 정치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영어 이름이 없단다. 그가 보여준 TV 현장기자 시절의 클리핑 영상 속에서 그의 리포트가 끝나자 스튜디오의 앵커가 ‘지영’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무척 정겨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지영이 명문 W 컬리지에 입학했다고 자랑했던 때가 90년대 중반이었다.
이곳 뉴저지에는 봄꽃 만개와 더불어 바야흐로 정치 계절의 막이 올랐다.
오는 11월의 본선을 앞둔 예선, 예비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인 밀집지역인 펠리세이드 파크만 하더라도 4팀이 임기 3년의 시의원 직에 민주당 공천을 노리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곳 특성상 민주당 예비선거 승리는 그대로 본선거의 승리를 의미한다. 예비선거는 오는 6월 4일 치러지게 된다.
예비선거의 규칙이 각 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뉴저지의 경우에는 정당 등록을 하지 않은 일반 유권자들도 참여할 수 있다. 단 타당에 등록한 유권자는 참여할 수 없다. 민주당 선거에 공화당원은 참여할 수 없다는 얘기다. 뉴욕의 경우는 등록된 당원만 예비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뉴욕의 예비선거는 9월이다.
지난 주말 필자는 아내와 함께 뉴저지 남단 체리힐이라는 타운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서울에 나가 있는 민 선배의 딸이 시의원에 도전한다고 해서 였다. 그녀가 바로 민지영 이었다.
젊은 한인 청년들의 미국 정치 도전에 대한 독려와 격려는 필자가 세 번째로 태평양을 건넌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체리힐은 뉴저지라고는 하지만 생활권이 필라델피아에 속해 있는 남단의 타운이다.
화창한 봄날의 턴파이크의 풍경은 공장지대 사이에 펼쳐지는 푸른 녹음과 꽃나무들로 해서 한 시간 반의 거리가 지루하지 않았다.
지영은 수수한 차림에 선그라스를 쓰고 자신의 타운하우스 콘도 앞에 나와 있었다. 출마를 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남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게 신경 쓰여 조심스럽단다. 다소 의외였다. 남들은 얼굴 못 알려 안달인데...
커피숍에 앉자마자 대뜸 왜 출마하려 하냐고 물었다. 그녀의 사연이 다소 의외이기는 했지만 이해는 됐다.
지영은 그동안 애써 모은 돈으로 지난해 초 꽤 비싼 신규 분양 콘도 타운하우스를 매입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 콘도의 시공이 문제였다. 곳곳에 누수가 있었고 문짝이며 미닫이가 뒤틀려 있었다.
시정을 요구했지만 약속은 말뿐이었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 참다못한 지영은 변호사를 동원해 소송까지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모처럼 아저씨 내외분 오셨는데 집으로 모시지 못해 미안해요. 워낙 집안이 엉망이라서...”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하는 지영은 시공업체 뒤에는 이곳 타운 정부와 주 정부의 검은 커넥션이 웅크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 남부 뉴저지와 필라델피아 ‘머신 데모크랫’의 코럽션(부정부패)은 말도 못해요.”
그녀는 머신 데모크랫이라는 말을 썼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법정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중 한 여성 변호사가 그녀에게 이럴 바엔 함께 정치에 참여해 바로 잡자고 권유했고, 그녀는 고심 끝에 이에 응하기로 했단다. 그 변호사도 자신도 민주당 소속이기는 하단다.
저들 ‘머신 데모크랫’에 대응해서 자신들 그룹은 ‘프로그레시브(진보) 데모크랫’이라고 했다.
이번에 자신들은 시장, 프리홀더(카운티 의회 의원), 시의원을 포함 5명이 셋트 런닝 메이트로 출마하기로 했단다.
정치는 잘못된 것을 색출하고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일단은 대중에 봉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얘기를 들려줄까도 싶었지만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다. 열심히 뛰어보라고... 하기는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이야 말로 공복(公僕)이 가져야 할 첫째 덕목 아닌가.
‘머신 데모크랫’이라는 말은 찾아보니 연원이 있는 말이었다. ‘폴리티컬 머신’이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노회하고 때묻은 기성 정치인들의 검은 결속을 의미했다.
물론 미국의 정치에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럴수록 젊은 새 피가 필요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90년대 생 지영, 2000년, 밀레니엄 세대 지영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시기 미국의 민주주의를 남달리 통찰력있게 연구했던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 토크빌은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토크빌은 유난히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미국의 장래가 밝은 것은 바로 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참여정신 때문이라고 했고 그의 말은 적중했다.
미국에서는 어디서나 토론이 벌어졌었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마을이나 국가에서 어떤 일을 하려 하건, 사람들은 치열하게 의견을 나눈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타협과 조정의 기술을 몸에 익혔고 그래서 누가 뭐래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세계 최강이다. 흑인 오바마도 장사꾼 트럼프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
팰리세이드 파크의 현 시장은 우리 한인 동포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시 승격 118년 만에 이룬 쾌거다. 팰팍은 인구 2만여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인이고, 상권의 90% 이상을 한인이 갖고 있었지만 정치력에서 만큼은 이방인이었다.
지난해 선거에서 민주당 크리스 정 시장은 공화당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가 본선에서 얻은 표는 2271표. 하지만 정작 진땀은 예비선거에서 흘렸다.
정 후보는 당시 민주당 예선서 현역 시장이었던 백인 후보에게 단 18표차, 박빙으로 승리했다. 1088표 대 1070표. 예비선거라 해도 한인들의 참여가 아주 절실한 이유다.
<저작권자 ⓒ 시애틀J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게시물은 webmaster님에 의해 2019-06-20 09:42:29 로컬뉴스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