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충남 예산 수덕사(修德寺)를 찾아
수덕사는 나의 고향 예산(禮山)에 있다. 나는 중학교 때 그곳으로 원족(遠足)을 갔다 왔다. 그때는 소풍이라 하지 않고 먼 길을 갔다 온다고 해서 원족(遠足)이라 했다.
집에서 40리(16km) 떨어져 있는 수덕사를 당일 갔다 오지 못하고 절에서 하루 저녁 자고 왔다. 말하자면 1박 2일인 셈이다. 넓은 절의 방에서 모두 합숙(合宿)을 해 밤새 이야기하느라 한잠도 자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추사 김정희 고택과 윤봉길 의사 충의사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온 김에 덕산 온천에 들러 바로 위에 있는 수덕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수덕사는 고려(高麗)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由緖) 깊은 고찰(古刹)이다. 이름 그대로 대웅전(大雄殿)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717년 전에 건축하였다니 목조건축으로서 과연 그 세월(歲月)이 얼마인가? 초현대식 공법에 의해 철골이나 콘크리트로 아무리 튼튼하게 짓는다 해도 100년도 못 가서 허물어야 할 판에, 나무로 건축(建築)한 지 717년이나 된다니 참으로 긴 세월이다.
대웅전은 웅장(雄壯)하지는 않지만 아담하였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순조선 소나무로 지은 건물로 고대건축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
아내와 같이 덕산온천을 하고 수덕사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절 뒤로 군락(群落)을 이룬 조선 소나무밭이 있었다. 717년 전 우리 선조들이 저 소나무로 절을 지었을 것이다.
조선 소나무는 한곳에 두 개의 바늘과 같은 잎이 나 있다. 계절풍이 거대한 군락(群落)을 이룬 소나무를 통과할 때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너무도 신비해서 그 곁을 떠나갈 수가 없었다. 그 소리를 잊지 못해 나중에 수필집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제목을 '솔바람 소리'로 정했다.
수덕사 경내(境內)에서 서쪽 계곡을 끼고 해발 500m의 덕숭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에서 12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일제강점(强占)기에 송만공(宋滿空1872~1946)이라 부르는 유명(有名)한 스님이 머물던 정혜사가 있다. 만공은 젊은 여자(女子)의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했다.
그를 일곱 여자(女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스님으로 치면 탈선(脫線)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덕사에서 잘 알려진 김일엽(金一葉)스님(1896~1971)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기독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早失父母)했다. 이화여전(梨花女專 이화여대)을 졸업하고 유학파로 여성(女性)해방(解放)과 자유(自由)연애(戀愛)의 상징(象徵)이었으며 여성잡지(女性雜誌) <신여자>를 창간하고 신문화 신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김일엽은 당대 유명한 시인이며 수필가였고 소설가였다. 여기 그녀의 시를 감상해 보자.
<으서져라 껴 안기던 그대의 몸 /
숨 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 잖아요
이광수(李光洙)는 그녀의 빼어난 문학적 소질을 인정하여 한국문단의 일엽(一葉, 나무의 한잎)이란 필명(筆名)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이광수를 사랑하게 되고 연인(戀人) 관계에 있었다. 김일엽이 결혼을 요구했지만 이광수는 부인이 있는 몸이라 거절하였다고 한다.
사실 김일엽은 22세 때 이미 40세의 연희전문 이노익 교수와 결혼하였으나 4년도 못 살고 이혼하였다. 그 이유는 남편이 발 하나가 없는 의족의 장애자이며 이혼남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광수와 연인(戀人) 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남자와 동거하며 사랑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세속(世俗)에 물들어간 신여성으로 이름을 떨치던 김일엽은 38세 되는 해에, 만공스님을 만나 수덕사의 견성암이란 암자에서 머리를 깎고 불자(佛子)가 되었다. 목사의 딸이 말이다. 김일엽이 만공스님을 만난 후 돌연 출가(出家)한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破格)이자 큰 뉴스거리였다. 이광수(李光洙)를 비롯하여 많은 지인들이 출가하지 말라고 권면했지만 막지는 못했다고 한다.
여기 출가(出家)는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불자(佛子)가 된다는 뜻이다.
그녀는 출가 후 25년 동안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글이란 망상(妄想)의 근원(根源)이 된다'고 절필(絶筆)을 했다고 한다. 여기 절필(絶筆)은 붓을 놓고 다시는 글(시, 수필,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후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를 가수 송춘희(宋媋禧)가 부르자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다. -1966년-
인적 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노래 말이 애절하다. 불교법사이자 가수인 송춘희는 10여 년간이나 무명가수였었는데 이 노래를 불러 히트를 쳐 10대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보통 대중가요는 세월이 지나면 대체로 잊혀져 가는 것이 보통인데도 이 노래는 오랫동안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의 가사를 보아도 이 노래가 김일엽을 주제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엽은 인생회고록 베스트셀러인 "청춘(靑春)을 불사르고"를 1962년도에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청춘을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청춘을 얻을 길이 없다." 이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구도(求道)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사르고 있다.
젊어서 여성해방과 자유(自由)연애의 상징(象徵)이며 신여성(新女性)운동의 선구자였던 그녀는 수덕사에서 불자가 되어 구도(求道)의 삶을 살다가 76세를 일기로 쓸쓸히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세상을 떠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