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 회계칼럼] 672. 과잉생산과 사치 2 - 시애틀 한인 커뮤니티 회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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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목 회계칼럼] 672. 과잉생산과 사치 2 - 시애틀 한인 커뮤니티 회계 칼럼

<지난 호에 이어>

마르크스는 어떤 것을 사치품이라 했나 하는 의문에 가장 구체적인 대답을 주는 문헌은 아마 1885년에 발간된 자본론 제2권일 것이다. 제20장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을 생산수단의 생산과 소비용품 생산으로 분류한 다음, 소비용품은 다시 생필품과 사치품으로 세분하고, 그중 사치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인용문 1. Articles of luxury, which enter into the consumption of only the capitalist class and can therefore be exchanged only for spent surplus-value, which never falls to the share of the labourer. 사치품, 즉 오로지 잉여가치의 소비 부분과 교환되어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손에만 들어가고 노동자들의 몫으로 떨어지는 일은 전혀 없는 물품. 


인용문 속에서 잉여가치의 소비라 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사업에서 얻은 이익 중 소비되는 부분이라는 뜻이다. 사업의 이익이 잉여가치로 불려지게 되는 이야기는 칼럼 659호(생산자이득과 공산주의 1)에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에는, 노동자들은 사업에서 이득을 얻을 일 없으므로 노동자들이 사치품을 소비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난주 칼럼(671호)에서 언급된, 먼 미래에 가서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운하, 부두, 터널, 교량 등의 일과 중요성과는 거리가 먼 가스, 전신, 사진, 기선 항행, 철도 등이 모두 사치로 취급된 이유가 여기에서 읽혀진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을 출간하던 1867년 즈음에는, 적어도 마르크스의 눈에는, 이 문단의 줄 친 항목들이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것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째, 처음에는 사치품이었다가 나중에는 일용품이 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사용하는 수많은 일용품들은 한때는 사치품이었다. 한때 사치품이었던 스마트폰이 만인의 일용품이 될 때까지는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20년 전에는 HDTV가 사치품이었으나 10년 전에는 일용품이 되었다. 30년 전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사치품이었으나 20년 전에는 일용품이 되었다. 40년 전에는 컬러텔레비전이 사치품이었으나, 30년 전에는 일용품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감안하면, 인용문 1에서처럼 정의된 사치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둘째, 처음에도 나중에도 사치품인 물품의 생산도 때때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 점을 마르크스가 분명히 인식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마르크스가 그것을 인식할 기회가 있었음은 마르크스의 저서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위 인용문 1과 함께 제20장 속에 있는 다음 말을 본다.


인용문 2. Every crisis at once lessens the consumption of luxuries. It retards, delays the reconversion of (IIb)v [역주: 사치품에 투입된 가변자본, 즉 인건비란 뜻] into money-capital, permitting it only partially and thus throwing a certain number of the labourers employed in the production of luxuries out of work, while on the other hand it thus clogs the sale of consumer necessities and reduces it. 위기가 올 때마다 즉시 사치품 소비가 감소된다. 이는 사치품에 투입된 가변자본이 현금 자본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지체시키고, 사치품 생산에 종사하던 노동자 중 상당수를 실직하게 만들고, 실직된 노동자들의 소득 감소는 생필품의 판매를 정체, 감소시킨다.


이것은 사치품이 경기변동에 예민하다는 뜻이며, 거기까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용문 2에서 발견되는바, 사치품 소비의 감소는 실업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치품 소비의 증가는 고용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마르크스는 마땅히 알아야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의식구조는 사치품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다. 인용문 1을 보면. 사치품 소비는 잉여가치가 있어야 가능하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 자체를 악으로 보고 잉여가치를 없애려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사치품 소비의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앞 문단을 음미하면, 사치품 소비의 증가는 도덕적으로 악해서 싫고 사치품 소비의 감소를 보면 고용이 줄어서 싫다는 논리 같다. 마르크스는 사치품을 대할 때 혹은 도덕적 기준, 혹은 실리적 기준을 번갈아 가며 적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치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에 문제가 있음이 발견된다.

위 두 개의 인용문 사이에서, 처음에는 사치품이었으나 나중에는 일용품이 된 네 가지 품목(컬러텔레비전, 개인용 컴퓨터, HDTV, 스마트폰)이 언급되었다.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서 사치의 긍정적 가치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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