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진달래 꽃방망이
이성수(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원)
한국에는 지금 진달래꽃이 만발(滿發)하고 있다. 진달래꽃 방망이를 만들던 소년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 집 머슴은 나무 짐 위에 연분홍 진달래꽃을 가득히 얹고 집에 돌아왔다. 내가 어릴 때는 산에서 낙엽을 긁어다가 땔감으로 충당했다. 머슴이 해 온 나무를 부엌 창고에 부렸다.
부엌은 어머니의 전용 공간이었다. 부엌은 지금처럼 실내에 있지 않고 밖에 따로 있어 그곳에서 어머니는 무쇠 솥으로 밥을 지으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부엌일을 하셨고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었다. 아궁이에서 소나무 삭정이와 잡목 등이 타면서 증기(蒸氣)가 지글지글 나왔다. 그 증기는 치마를 입은 어머니의 아랫도리(下體)를 아궁이의 댓돌과 황토(黃土)흙이 불 달았을 때 발생하는 원(遠)적외선과 합하여 부인병을 예방해 준다고 한다. 즉 원적외선이 인체에 닿으면 피부 속 4~5cm까지 일반 열보다 80배나 깊이 스며들고 세포를 미세하게 흔들어 혈액순환을 잘 시킨다고 한다. 피가 맑아져 부인병을 예방해 준다니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를 위시하여 그 당시 농촌 여인들은 부인병(자궁암)을 모르고 살았다.
나는 나무 짐 위에 있는 진달래꽃을 골라 누나와 같이 예쁜 진달래꽃을 촘촘히 가지런하게 모아 꽃다발이 아닌 ‘꽃방망이’를 여럿 만들었다. 혹시 시들 새라 물속에 담가 놓고 감상(感想)을 하며 누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나는 소년기에 동리에 내 또래의 남자애가 없어 누나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같이 놀았다.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나와 누나 또래들은 나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5~6명의 누나 또래들과 같이 늘 학교도 오갔다.
지금은 버스가 연락부절이지만 그때는 2km나 되는 등교 길을 걸어 다녔다. 누나들은 단발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치마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다 여자들인데 나만 남자였다.
나는 누나들과 같이 자갈 깔은 신작로(新作路 지금의 국도)길을 조잘대며 터덜터덜 걸어 동리 입구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작고 좁은 꼬불꼬불한 길이지만 오른쪽은 천수답 논이 옹기종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왼쪽은 낮은 야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봄기운이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시골길을 걷다가 길옆에 돋아나는 삐삐를 뽑아 먹었다. 그 달착지근한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찔레 순을 꺾어 먹기도 했다. 입에 넣으면 스르르 녹아 풋풋한 찔레 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옆 야산에 지천으로 활짝 핀 진달래꽃을 따 먹었다. 아카시아 꽃보다는 덜 달지만 입안이 개운했다.
우리들은 500m가량의 소로(小路)길을 걸어 집에 오곤 했다.
누나들이 오는 일요일에 진달래 화전(花煎)놀이에 간다고 했다. 화전은 진달래꽃을 넣고 부친 부침개이다.
어른들의 천렵(川獵)은 따라다녀 보았지만, 화전놀이는 처음이다. 천렵은 냇가에서 했지만, 화전놀이의 장소는 앞산의 계곡이었다.
화전놀이 준비는 나이 찬 처녀들이 했지만 심부름은 누나들이 하였다. 이 행사에 부인들은 양보하고 관여하지 않았다.
날씨가 따뜻한 일요일에 화전놀이 채비를 머슴이 바지게로 하나 가득 지고 출발했다. 짐은 양은 솥단지만도 2개, 무쇠 솥 뚜껑, 냄비, 사발, 접시, 칼, 도마, 수저, 양념 등등 오만가지이었다.
한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이 졸졸 흐르는 앞산의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머슴은 도착하자마자 가지고 온 솥단지를 걸고, 물을 길어 오고, 소나무 삭정이를 꺾어 왔다.
진달래꽃을 찾아 말(馬)만 한 처녀들과 초등학교 여자애들은 무리지어 산등성을 올라갔다. 활짝 핀 진달래꽃을 보고 모두 탄성을 질렀다.
봄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엷은 핑크색의 진달래꽃은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새댁처럼 아름다웠다.
잎이 피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진달래꽃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일찍 피는 강인한 꽃이다. 나도 누나들과 처녀들의 틈에 끼어 진달래꽃을 꺾었다.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시원한 미풍(微風)이 이마의 땀을 씻어 주었다. 진달래꽃을 따서 먹어보았다. 달착지근하며 약간 떫으나 산뜻한 진달래 풍미가 입안 가득히 퍼졌다.
어느새 산에서 내려온 처녀들은 화병(花餠)을 부치고 점심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솥뚜껑을 거꾸로 엎어서 걸어 놓으니 영락없는 대형 프라이팬이 되었다. 밑에서 불을 지폈다. 들기름을 조금 붓고 밀가루를 물로 반죽하여 진달래꽃을 넣고 부침개를 부쳤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산 계곡을 타고 퍼져나갔다. 동네잔치 집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를 산속에서 맡으니 잔치 집 기분이 물씬 났다. 우리들은 부쳐내는 진달래꽃 화병(부침개)을 맛있게 먹었다. 들기름 향과 진달래 향이 어울려 환상의 맛을 북돋아 주었다.
나는 누나들을 따라 물이 졸졸 흘러가는 계곡에서 돌 밑에 숨어 있는 가재를 잡았다. 일급수에서 자라는 가재는 의외로 많이 잡혔다. 그 가재를 점심 반찬으로 요리를 했다. 고추장을 풀어 지져 놓으니 빨간 게 먹음직스러웠다. 식사 전에 나이 많은 처녀가 보리밥 한 수저를 퍼 계곡에 던지며 “고수레!” 하였다. 지금은 식사기도를 하지만 교회가 없던 그 시절엔 산신(山神)에게 먼저 고(告)하는 의식이었다. 고수레는 고조선시대 농사와 가축을 관장하는 고시(高矢)라는 신을 말한다. 세월이 흘러 고시((高矢)가 고시네, 고시네가 고시레, 고시레가 지금의 고수레로 바뀌었다.
즉석(直席) 요리한 가재찌개는 인기였다. 식사 후 우리들은 진달래꽃을 꺾어다가 꽃방망이를 만들었다. 뚱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홀쭉하지도 않은 날씬하게 만든 예쁜 꽃방망이가 단연 1등감이었다.
누가 만든 것이 예쁜지 비교(比較)하면서 우리들은 열심히 솜씨껏 꽃방망이를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선물하려고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